독립전쟁 기념공원
관광안내소를 찾아가서 콩코드의 주요 관광지를 알려달라고 했더니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이 지도를 꺼내서 쭉 표시해주시고, 영국군에 맞서 미니트맨들이 대항해서 승리한 독립전쟁 기념공원을 설명해 주셨다. 낯선 단어인 미니트맨(Minutemen)이 무어냐고 물으니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외부 침입자가 몰려온다는 비상 소집통지를 받으면 몇 분 안에 총을 들고 집결지로 집합하여 전투에 참여함으로써 마을을 지키는 농민자위대라고 알려주신다. 설명을 들으니 우리나라 군대의 5분대기조가 연상되어 미니트맨이 금방 이해되었다.
사일구 의거일이 한국에서만 중요한 날인줄 알았더니 1775년 4월19일은 이곳 콩코드에서도 독립전쟁의 첫 총성이 울린 날로서 중요한 날로 기념하고 있었다. 매사추세츠주와 메인주에서는 4월19일을 ‘애국의 날(Patriots' day)'로 기념하고 있으며, 이날을 기념하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가 열리기 시작한지 1세기가 넘었다. 이 콩코드 시민들의 봉기가 인근 렉싱턴, 보스턴으로 이어져 독립전쟁의 불길이 붙은 것이다. 그래서 콩코드는 미국의 역사와 정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내가 찾은 날에도 여러 학교에서 수시로 많은 학생들을 인솔하고 와서 독립전쟁의 의미와 선조들의 거룩한 희생과 의거를 보여주고 들려주고 있었다. 마을 어른들이 독립전쟁 당시의 복장으로 소총을 들고 행진하며 자세하게 미국의 영광스런 역사를 설명하고 재현해 보여주었다. 이 작은 마을 콩코드는 미국정신의 산실이요, 미국인들의 성지다. 매년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는 순례코스다.
독립전쟁의 시작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영국은 전쟁을 통하여 북아메리카의 프랑스령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갔고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를 빼앗았다. 이런 전쟁들에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면서 빚더미에 올라 앉게 된 영국 정부는 식민지 제국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하여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의 조세를 강화해 나갔다. 식민지에 설탕세, 인지세, 차세 등을 부과하여 재정적 난관을 타개하려는 영국 정부에 대하여 식민지인들은 거세게 항의하였으며, 마침내 1773년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식민지인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격앙된 영국정부는 소요를 일거에 가라앉히기 위해 강경 조치를 취했다. 보스턴 항 폐쇄, 매사추세츠주의 자치권 몰수, 재판권 회수, 본국 군대 주둔비용의 식민지 부담 등의 강압법을 통과시키고, 새 총독을 임명하여 군사령관을 겸임시키고 4개 연대를 보스턴에 파견했다.
그러나 사태는 예상 밖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공동 대응을 위하여 전 식민지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고 본국 정부에 저항하기 위한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이 반란사태에 대하여 본국 정부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반란군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비축 무기를 몰수하기로 결정했다. 1775년 4월 19일 새벽, 700여 명의 영국군 정규군이 콩코드에서 가까운 렉싱턴 코먼 근처에 당도했을 때, 인근에서 출동한 80여 명의 미니트맨들이 영국군의 진격을 저지하며 맞섰다. 보스턴에 사는 전령병 폴 리비어가 밤새워 말을 달려와 영국군 출동 사실을 미리 미니트맨들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숫적으로 불리한 미니트맨들이 영국군 장교의 해산 명령에 따르려는 순간에 누군가가 총을 발사했다. 독립전쟁의 첫 총성이 울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양측의 교전이 시작되었고 전투가 벌어져서 8명의 미니트맨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을 당하며 미니트맨 대열은 와해되었다.
렉싱턴에서 미니트맨을 제압한 영국군은 이어서 콩코드로 진격했다. 콩코드의 미니트맨들은 숫적 열세를 감안하여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콩코드강의 노스브릿지 너머 작은 언덕 뒤에 집결해서 관망하고 있었다. 그 사이 영국군은 콩코드 시내를 샅샅이 수색하였으나 작은 대포 몇 문 외에는 화약을 찾아내지 못했다. 폴 리비어로부터 미리 연락을 받은 미니트맨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서 숨겨놓았기 때문이었다. 영국군은 빈 무기고에 불을 질렀다. 불이 마을회관으로 옮겨 붙으면서 시내에 연기가 자욱했다. 멀리 노스브릿지 건너 언덕 위에 집결해있던 미니트맨들은 영국군이 마을에 불을 지른 것으로 오인하고 분격하여 이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다리 쪽으로 이동했다.
드디어 교전이 벌어졌다. 대다수가 농부인 미니트맨들이 영국 정규군에 맞서 싸운 첫 전투였다. 미니트맨들이 점점 불어나 500여명으로 늘어나자 당황한 영국군은 보스턴으로 퇴각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000여명으로 불어난 민병대측이 퇴각하는 영국군을 추격하며 공격했다. 이틀간의 전투에서 영국군은 99명이 사망하고 174명이 부상당했으며, 시민군은 54명이 사망하고 41명이 부상했다. 영국 정규군이 비정규 시민군에게 대패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독립전쟁은 1776년 3월 영국군과 1,100여명의 보스턴 왕당파 인사들이 보스턴 항을 떠남으로써 보스턴이 해방되었고, 1776년 7월 4일 마침내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은 계속되어 1781년 버지니아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이 항복할 때까지 8년간 이어졌다.
강물 위에 걸친 소박한 아치다리 옆에서
그들의 깃발이 사월 미풍에 날렸다.
여기 한때 농부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그들이 쏜 총소리가 온 세상에 울렸다
By the rude bridge that arched the flood,
Their flag to April's breeze unfurled,
Here once the embattled farmers stood
And fired the shot heard 'round the world.
에머슨의 집에서 건너다 보이는 콩코드강 위에 걸쳐진 작은 다리 곧 노스브릿지에서 울린 총성이 전 세계에 미국 독립의 고고성을 알렸다는 에머슨의 시 <콩코드 찬가 (Concord Hymn)>의 도입부다. 시의 제4행 ‘shot heard ’round the world (총소리가 온 세상에 울렸다)’라는 구절은 가는 곳마다 들려주는 유명한 싯구다.
노스브릿지를 통해 콩코드강을 건너가면 드넓은 초원을 뒤로하고 산뜻한 미니트맨 동상이 서있다. 오른손에는 총을 들고 왼손에는 쟁기 손잡이를 잡고 있는 미니트맨 동상은 농부이면서 군인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서 노스브릿지 전투 100주년을 기념하여 1875년에 제작 봉헌되었다. 이 동상은 유명한 조각가 다니엘 체스터 프렌치가 조각한 것이다. 프렌치는 그후 워싱턴 DC의 링컨 동상, 하버드 대학교의 존 하버드 동상 같은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동상을 제작한 사람이다.
“세상에 우리의 혁명보다 더 찬란한 운동은 없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위대하고 고결한 정기로 충만했다” - 호손,
“절대 왕정에서 제한된 왕정으로 그리고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개인에 대한 진정한 존중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쏘로,
“어떤 혁명도 처음에는 한 사람의 마음에 품은 생각이었다” - 에머슨
처음에 미니트맨들이 진주했던 노스브릿지 너머 벌판 위에 있는 언덕에 그들의 자긍심을 심어 세워놓은 간판에 씌어있는 글이다.
짧지만 알찬 일정이었다. 역사와 자연이 모두 아름다운 콩코드에서 하루 더 머물며 렉싱턴과 세일럼을 방문하고 싶었으나 오늘도 다음 목적지로 떠나야 한다. 이젠 미국 역사 공부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며 즐기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매사추세츠주를 떠나 미국 지도의 가장 동쪽 꼭대기에 위치한 메인주로 출발한다. 대서양의 맑은 해변을 구경하기 위해 오건퀴트(Ogunquit)로 간다. 콩코드로부터 이동거리 83마일 소요시간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다. 이제 날씨가 좀 도와줘야 아름다운 자연을 즐길 수 있을텐데... 이제부터 미국 동쪽 대서양 해안을 남북으로 잇는 주간고속도로 95번을 타고 북쪽으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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