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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ENGLAND

콩코드 2

에머슨 하우스

 

 

무엇이 성공인가?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 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뙤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랠프 왈도 에머슨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글이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여 인터넷에 많이 떠다니는

 

글이다.

 

 

 

랠프 왈도 에머슨은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목사직을 수행하다가“좋은 성직자가 되기 위해 교회를 떠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목사직을 사임했는데,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전복시키려 했다며 그를 비난했다. 에머슨은 1838년에 자신의 모교인 하버드 신학대학교에서 한 연설 때문에 30년 동안 하버드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이 연설에서 에머슨은 교회가“하느님이 죽은 것처럼” 행동하고, 교인들의 영혼을 옥죄며, 교리만을 강조한다고 교회를 비난했다. 나 자신도 오늘의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똑같은 느낌을 갖고 있어 깊이 공감하며 그를 바라보게 된다. 한편으론 기독자는‘하나님 앞에서(In front of God), 하나님과 함께(With God) 그리고 하나님 없이(Without God)'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가 연상되었다. 에머슨은 그후 시인, 수필가, 강연자로서 종교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운동을 하며, 많은 저작을 했다.

 

 

에머슨 하우스는 현재 에머슨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고, 다른 박물관 보다 빠른 4월말부터 문을 열어 둘러볼 수가 있었다. 하얀 2층집 한가운데 현관지붕위에는 미국 정신의 상징이라는 듯이 성조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우리 부부가 입장하자 우리 두 사람만을 위해 가이드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1층 현관 거실은 매표소 겸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에머슨의 책이 벽면에 가득 꽂혀 있었다. 그 옆 응접실로 안내되어 앉자 가이드는 부드럽지만 빠른 영어로 에머슨의 일생과 역사 문화적 활동을 비롯하여 각 방의 용도와 특징, 가구와 사진, 그림 등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영어가 짧은 우리는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입장객들을 위한 그녀의 직무인것을.

 

 

 

약 180여 년 전에 지어진 이 집은 에머슨이 첫째 부인과 사별한 후 둘째 부인과 살기위하여 1835년 구입한 집으로, 택호를 ‘Bush(덤불숲)’라고 했는데, 지금은 단정한 잔디정원이지만 구입 당시에는 집 주변 삼면이 관목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면은 월든 호수가 있는 숲으로 난 길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인가 보다. 집과 각 방들은 에머슨 가족이 살던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고 정리되어 있었다. 에머슨이 저술하며 쓰던 책상을 비롯한 주요 가구들은 길 건너 편에 있는 콩코드 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어 모조품이 비치되어 있다. 2층 그의 서재에는 많은 책이 소장되어 있었고, 그의 친구들인 쏘로와 호손, 기타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 회원들이 자주 드나들며 책을 빌려 읽고 토론과 대화를 하던 지적 아카데미였다. “집을 가장 아름답게 꾸며주는 것은 자주 오는 친구들이다”라는 에머슨에게 얼마나 좋은 친구들이 많았겠는가? 에머슨의 친화력과 영향력 덕분에 많은 지성인들이 이 집을 드나들게 되었고, 지성의 전당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특히 쏘로는 에머슨의 가족같이 방 한칸을 빌려쓰며 에머슨 부부를 형님, 누님이라 부르며 서재를 이용했고, 에머슨의 아이들도 쏘로가 호숫가에서 만들어 온 나뭇가지 인형들을 받아들고는 기뻐하며 그를 따라 다녔다. 에머슨이 보던 책들은 현재 하버드 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1872년에 이 집에 큰 불이 났는데,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고 에머슨의 책과 원고들은 동네 사람들이 나서서 먼저 날라주어 소실되지 않았다. 에머슨이 유럽과 이집트 여행을 떠난 사이 마을 사람들은 모금을 하여 이 집을 완전히 복구해 주어 에머슨에게 깜짝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는 1882년 죽을 때까지 약 50년간 이 집에서 살면서 수많은 시와 저서를 발표하고 초월주의 운동을 비롯하여 기독교 개혁, 노예해방을 주창하며 미국의 정신을 선도해 나갔다.

 

 

문인들의 옛집 : 목사관(The Old Manse), 길가집(The Wayside), 과수원집(Orchard House)

18세기에 지어진 이 집들은 에머슨, 호손 그리고 올콧 집안에서 서로 사고 팔고 빌리면서 거주했던 콩코드의 옛집들로서 서로 가까이 위치해 있고, 자주 방문했던 에머슨의 집과도 불과 몇 백m 거리다.

 

 

목사관 올드 맨스는 랠프 왈도 에머슨의 할아버지 목사님이 지은 집으로 미국 독립 전쟁의 시발점이 된 콩코드 노스브릿지 전투를 이 집에서 창문 너머로 목격했을 정도로 ‘미니트맨 국립 역사 공원’과 가깝다. 이 분이 돌아가신 후에 재혼한 할머니의 남편 에즈라 리플리 목사님 가문의 소유가 되었으며, 랠프 왈도 에머슨도 한때 의붓 할아버지와 같이 이 집에서 살면서 그의 명저 ‘자연(Nature)'을 저술한 곳이다. 1842년 나다니엘 호손이 이 집을 임차해서 신혼살림을 시작하고 집의 이름을 올드 맨스라고 불렀다. 맨스(Manse)란 스코트랜드 말로 목사관을 일컽는 말이다. 그러나 친구 쏘로가 텃밭도 일구어 주며 도와주었으나 월세를 내지 못해서 3년 만에 쫒겨났다. 올드 맨스에서 살던 3년동안 호손은 20여편의 단편소설을 썼다. 현재 국립역사유적지로 지정된 이 집은 6월부터 개장되어 옛 건물의 인테리어와 내부 건축양식 그리고 옛 가구와 부억등을 둘러볼 수는 없었다. 건물 안내 간판에는 ’미국의 탄생과 초월주의의 탄생, 두 개의 혁명을 목격한 집‘으로 소개되어 있다. 목사관 뒤뜰에는 콩코드강이 휘돌아 흐르는데, 강가에 서있는 작고 낡은 헛간마저도 새봄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연한 수목의 잎들과 어울리니 한 폭의 수채화가 되었다.

 

 

 

웨이사이드는 올콧 집안에서 1845년에 구입할 때는 ‘Hillside'라는 이름이었는데 1852년에 콩코드를 떠나면서 나다니엘 호손에게 팔았으며, 호손이 택호를 ’The Wayside(길가집)'로 바꿨다. 웨이사이드는 뒤에 다시 아동문학가 마아가렛 시드니(Margaret Sidney)의 소유가 되어 당대 여러 유명 문학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유서깊은 집이 되었다. 오래되어 허술하게 보이지만 제법 입체적으로 규모있게 멋을 낸 이 삼층집도 나와는 인연이 없는지 6월부터 개장한다며 문이 닫혀 있어 허탕치고 돌아섰다. 주홍글씨를 비롯한 여러 작품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호손의 삶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갔다.

 

호손은 콩코드에서 약 45km 떨어진 세일럼(Salem)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조상 중에서 유명한 세일럼 마녀재판에 관여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는 성을 갈았다. 원래의 성 Hathorne에 w를 첨가하여 Hawthorne으로 바꾸고 콩코드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리고 몇 차례의 짧은 방문을 제외하고는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실향민으로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향을 늘 마음 속에 그리며 살았던 것 같다. 그의 작품 ‘일곱 박공의 집’은 고향 세일럼을 무대로 하고 있다.

 

웨이사이드를 팔고 보스턴으로 갔던 올콧 집안은 그 후 콩코드로 다시 돌아와서 1858년에 약 15,000평의 과수원이 딸린 18세기 초의 집을 사고 택호를 Orchard House(과수원집)이라고 붙였다. 작은 언덕의 푸른 숲으로 아늑하게 둘러싸인 짙은 회색의 단정한 대칭형 이층집인 과수원집에서 올콧 집안사람들이 약 20년간 살았다. 이때 올콧 집안사람들의 구성원은 아모스 브론슨 올콧(Amos Bronson Alcott)과 부인 아비가일 메이 올콧(Abigail May Alcott) 그리고 루이자 메이(Louisa May)를 비롯한 세 딸이 있었다. 또 한명의 딸 엘리자베스(Elizabeth)는 이 집에 이사하기 몇 주 전에 사망했는데 소설 ‘작은 아씨들’에서 베스 마취(Beth March)의 모델이었다. 올콧 식구들은 정원과 과수원에서 수확한 채소와 과일을 주식으로 하는 채식주의자였으며, 노예해방, 여성참정권, 사회개혁과 같은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브론슨 올콧은 에머슨을 비롯한 쏘로, 호손과 사상적 교류를 깊이 하며 여러 저서를 남겼고, 과수원집 옆에 직접 지은 The Hillside Chapel(언덕가 교회)에서 성인교육센터 ‘콩코드 철학학교’를 운영하였다. 창고같이 지어진 검은 목조건물에서는 오늘날에도 1977년부터 이 철학학교가 부활되어 운영되고 있다. 이 집안 출신 또 한명의 저명인사는 루이자 메이 올콧이다. 소설 ‘Little sisters(작은 아씨들)’이 그녀의 대표작이다. 어린 시절 독서량이 부족했던 나는 전혀 모르는 소설인데, 울각시가 작은 아씨들이란 책이 한국에서도 많이 읽힌 책이고 영화로도 여러 번 나왔는데 왜 모르냐고 핀잔을 준다. 이 아담한 고옥에 들어서면 매표소 겸 기념품점이 있고, 올콧 집안에서 사용하던 오리지날 가구들을 포함해서 19세기 중반의 인테리어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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