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창립 375주년임을 축하하는 깃발
하버드 캠퍼스 투어
미국의 파워는 금융의 도시 뉴욕과 정치의 도시 워싱턴과 지식의 도시 보스턴에서 나온다고 한다. 보스턴은 그야말로 세계의 천재들이 한 곳에 모여 그들의 상상력과 네트워크를 확대 재생산하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최고의 대학 하버드와 MIT, 그리고 보스턴 대학교, 노스이스턴 대학교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대학교가 이 도시에 몰려있다. 오바마 현 대통령을 비롯하여 미국의 권력자들과 지성인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해 내고, 노벨상을 받은 수 많은 사람들이 이 곳 보스턴에서 공부한 인재들이다.
하버드 대학교 캠퍼스 투어에 참가해서 따라 다녔다. 생각보다 캠퍼스는 크지 않았다. 매일 엄청난 하버드 대학교 방문 관광객들이 캠퍼스를 누비고 다닌다. 하버드 동상의 발가락을 만지면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는 누군가 꾸며낸 전설에 따라 너도 나도 만져대는 발가락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지나가는 학생 하나하나가 세계적 천재인 듯 하여 달리 보였다. 이에 비해 MIT는 캠퍼스 규모가 훨씬 크고 건물은 현대식 디자인으로 건축되어 있었다.
하버드 대학교 학생의 인솔을 따라 학교 탐방에 나섰다. 하버드 대학교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만큼 많은 전설과 루머가 존재하고 갖가지 실제 스토리가 얼키고 설켜 관심과 흥미를 더해준다.
하버드 대학교는 현재 6,500명의 학부생과 12,000명의 대학원생이 재학하고 있다. 학부생의 연간 등록금은 U$51,000정도이며, 학생의 약60%가 장학금 혜택을 받고 있고, 특히 가족의 연간 소득이 U$60,000이하면 등록금이 전액 면제된다.
<존슨 게이트(Johnson Gate)> 세계 최고 대학교의 정문이라기에는 매우 소박하고 작아 보인다. 멀리 흰 건물 앞의 하버드 동상 앞에 관광객들이 바글거린다.
하버드 대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4-5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들로 둘러싸인 잔디광장 하버드 야드를 만나게 된다. 이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 건물들은 대부분 기숙사들인데 인솔학생은 각 건물의 특정 방을 가리키면서 존 에프 케네디를 비롯한 대통령들과 정치인들, 유명한 배우들과 기업인들 아무개가 언제 저 방에서 생활했다는 둥 열거해 댔다. 하버드 야드 잔디밭에 서있는 가로등에는 금년이 하버드 창립 375주년임을 축하하는 깃발이 여기저기 펄럭였다.
하버드는 원래 신학대학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남학생만 입학이 허용되었다. 그러다 1879년에 부설학교로 여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래드클리프 대학(Radcliff College)이 창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드 대학교의 여성 차별의 역사는 길고 끈질겼다. 래드클리프는 하버드 대학교와 교수진은 같았지만 전혀 다른 학교로 운영되었다. 그러다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학생들과 교수들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래드클리프 여학생들이 하버드 교실에서 강의를 듣는 것이 허용되었다.
1970년에서야 학부 여학생 제한 조치가 철폐되고 남녀 학생들이 공동의 생활공간에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부터는 남녀 공학으로 운영되었으나 졸업장은 달라서 남자는 하버드 대학교 여자는 래드클리프 대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1999년에 래드클리프가 공식적으로 하버드 대학교에 통합되어 드디어 같은 학교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역사적 진보가 이루어지기 까지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수구세력의 견제와 방해로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수난과 고통을 당해온 역사를 되돌아보면, 현재 우리가 당면한 많은 모순과 부조리를 다시 한 발짝씩 해결해 나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하며 투쟁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하버드 대학교의 정문은 존슨 게이트(Johnson Gate)라고 불린다. 세계 최고 대학교의 정문이라기에는 매우 소박하고 작아 보인다. 옛날엔 학생들이 학교에 입학할 때와 졸업할 때만 정문으로 출입할 수 있다는 미신이 있었다고 한다.
과학센터 건물은 하버드 대학교의 고풍스런 건축물들과는 다른 현대식 건축물이다. 이 학교는 인문학을 바탕으로한 교육 시스템을 추구하기 때문에 과학센터에서의 수업도 인문학 전공자들이 많이 듣고 있단다. 가이드하는 학생도 사회학과 컴퓨터 사이언스를 동시에 전공하며 과학센터 수업을 듣고 있다고 한다. 그는 수업의 절반은 전공과목(사회학과 컴퓨터 공학)을 듣고, 교양인문과목 1/4, 선택과목 1/4을 듣는데, 선택과목은 현대무용을 하면서 전에는 접할 수 없었던 많은 아이디어를 얻고 있어 매우 유용하다고 한다.
하버드에서는 학생들의 커뮤니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학생들이 서로 다른 전공자들과 소통하면서 서로 아이디어를 주고 받을 수 있어서 새롭고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형성되며, 특히 괴팍한 학생들의 생각과 독특한 아이디어를 존중해준다고 한다. 일학년 학생들은 같은 기숙사에서 살고, 점심시간도 일학년 전용식당에서 자기들끼리만 점심을 먹으며 대화를 하도록 되어있다. 일학년에게는 커뮤니티 활동을 가장 중요시 한단다.
하버드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건물로 뽑히는 메모리얼홀은 앞뒤의 벽이 대형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있고 건물 중앙에 커다란 탑이 솟아있어서 교회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1878년 완공된 후 한 번도 교회로 사용된 적은 없다고 한다. 메모리얼홀은 하나의 건물이면서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세 부분의 모양이 각자 독특한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파스텔톤의 줄무늬 지붕도 아름답다. 세 개로 구분된 홀은 각각 달리 사용되고 있는데, 첫째, 건물의 중앙 홀이 실제적인 메모리얼홀로서 남북전쟁에서 전사한 하버드 졸업생들을 추모하는 방이며 벽에는 그들의 이름, 출생지, 생년월일, 전사장소, 전사일, 계급 등을 새긴 판이 붙어있다. 둘째, 왼쪽 홀(Annenberg Hall)은 일학년 식당으로 사용되며, 일학년 외에 상급생들은 출입이 제한된다. 셋째, 오른쪽 홀은 샌더스 극장(Sander's Theather)이라고 하며 가장 큰 방이다. 1600명을 수용할 수 있어서 공연장으로 사용되며, 많은 학생들이 수강하는 경제학입문이나 컴퓨터공학입문 같은 대형 강의가 이 방에서 진행되기도 하며, 요즘 유명한 마이클샌들의 ‘정의론(Justice)' TV강의도 이곳에서 진행된다. 또 유명 인사들의 강연도 이 방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데 윈스턴 처칠, 버락 오바마, 달라이라마, 존 에프 케네디 등 저명인사의 강연과 최근에는 레이디 가가의 강연이 여기서 이루어졌다. 과거에는 졸업식도 여기서 거행되었는데 1900년대 초부터 야외 졸업식으로 바뀌었다.
<메모리얼 교회 앞 잔디광장> 제1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하버드 졸업생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1936년에 지어졌으며, 매년 이 잔디광장에서 졸업식이 거행된다.
전쟁으로 죽은 졸업생들을 기념하는 건물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메모리얼 교회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하버드 졸업생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1936년에 지어졌다. 하얀 첨탑이 매우 높게 뻗은 교회는 초교파적 예배공간으로서 다양한 교파의 예배를 허용한다. 은 졸업식이 메모리얼 교회 앞 잔디광장에 25,000개의 의자를 놓고 거행하며, 연단은 교회 계단을 이용한다. 졸업식장에 입장하려면 졸업생들에게 배부되는 입장표를 구해야 하는데 경쟁이 치열해서 표가 없는 손님들은 캠퍼스 여기저기에 설치된 TV화면을 통하여 졸업식을 지켜볼 수 있다.
메모리얼 교회와 잔디광장을 마주하고 있는 중앙도서관은 하버드 대학교 전체 장서의 1/3인 약 5백만권의 장서를 갖추고 있다. 이 도서관은 해리 엘킨스 와이드너(Harry Elkins Widener)의 이름을 따서 와이드너 도서관이라고 하는데 공식 명칭은 ‘해리 엘킨스 와이드너 기념 도서관 (The Harry Elkins Widener Memorial Library)’이라고 한다.
이 사람은 1907년에 하버드를 졸업한 사람이다. 그는 고서 수집이 취미였으며 유럽으로 건너가서 책을 수집해서 1912년 책을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오다가 배가 빙산에 부딪쳐서 침몰하게 되었다. 그 배가 타이타닉호였다. 그는 일등선 고객이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구명보트에 탈 수 있었는데, 보트에서 자기의 귀중한 책을 선실에 놓고 온 것이 생각나서 가지러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고. 그의 어머니만 살아남아 돌아왔다. 그 어머니는 아들을 위하여 하버드에 2백만불을 기증하여 도서관을 지었다.
하버드 대학교 중앙도서관 ‘해리 엘킨스 와이드너 기념 도서관 (The Harry Elkins Widener Memorial Library)’
그런데 몇 가지 기증조건이 있었다. 도서관은 건립 당시의 상태로 보존하고 단 한 개의 벽돌이나 돌도 옮기지 말라고 했다. 현재 이 도서관은 1914년 건축 당시의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또 도서관 안에 아들을 위한 방을 만들고 매일 꽃을 놓아달라는 요구가 있어서 지금도 도서관장이 매일 들어가서 성경책을 한 장 넘겨주고 붉은 카네이션을 놓아준다고 한다. 또 자기 아들과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학생들에게 수영 시험을 실시하고 합격자만 졸업시키게 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장애인법이 제정되면서 장애인들에게 가혹한 이 조건은 폐지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루머 같은 조건이 있다.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으로 호기심을 자아내는 것 같다. 하버드에서는 식당에서 매일 아이스크림을 학생들에게 제공하는데 이것도 와이드너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해서 그 어머니가 요구한 것이라는 말도 있단다.
하버드에서 제일 유명한 존 하버드 (John Harvard) 동상에도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이 동상은 유명한 조각가 다니엘 체스터 프렌치(Daniel Chester French)가 만들었는데 그는 워싱턴 DC의 링컨 동상, 콩코드의 미니트맨 동상 등 유명한 동상을 많이 만들었다.
이 동상에는 세가지 거짓이 있다고 한다.
첫째, 하버드는 이 대학교의 창립자가 아니다. 하버드 동상에는 “존 하버드 설립자, 1638년” 이라고 적혀있으나 그는 창립자가 아니고 기부자다. 학교는 이미 1636년에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당국에 의해서 퓨리턴 인재 교육기관으로 창립되었는데, 1638년에 장로교 목사였던 존 하버드가 죽으면서 이 대학에 장서 200여권과 소유 부동산을 기증했다. 이를 기념하여 학교명을 하버드로 바꾸었으며, 그가 영국에서 다녔던 케임브리지 대학 이름을 따서 동네 이름도 케임브리지로 바꾸었다.
둘째, 하버드 대학교의 설립연도는 동상에 새겨진 1638년이 아니라 1636년이다. 1638년은 하버드가 재산을 기증한 해다.
셋째, 하버드 동상의 얼굴은 실제 그의 얼굴 모양이 아니다. 이 동상은 1884년에 세워졌는데, 그로부터 120년전인 1764년에 도서관에 화재가 나서 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던 존 하버드의 유일한 초상화가 소실되어 그의 얼굴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각가 프렌치는 당시 미술학도였던 셔만 호어라는 학생을 모델로 삼아 동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인솔 학생은 하버드 동상의 발가락을 만지고 나서는 반드시 손을 씻으라고 조언하며 낄낄댄다. 왜냐하면 학생들 중 하버드 동상에 올라가 실례를 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학생들이 종종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그들은 소변보러 가는 일을 ‘존에게 가기 (Going to the John)'라고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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