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9일 수요일
뉴포트에서 장원구경을 더 하려다가 비가 많이 내리는 바람에 계획을 바꿔 청교도의 첫 기착지 플리머스로 떠났다. 뉴포트에서 플리머스까지 다시 북동쪽으로 이동거리 58마일 소요시간 1시간 10분이다. 주도 MA-24 북향길을 타고 가다가 국도 US-44 동향길로 바꿔 탄다.
메이플라워Ⅱ
400년 전 영국 국교회의 박해를 피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 102명이 목조 범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생명을 걸고 생면부지의 땅으로 무작정 건너와 갖은 고생을 하며 정착에 성공한 대단한 의지와 신념의 사람들의 땅이다. 신대륙에 첫 발을 내디딘 땅을 그들이 떠났던 기항지 영국 항구의 이름 그대로 플리머스라고 불렀다. 영어 철자는 Plymouth인데 그들은 동일한 이름의 다른 도시와 차별화하기 위해 발음 나는 대로 Plimoth로 쓰기도 한다.
플리머스는 미국의 역사, 문화, 민속적 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뉴잉글랜드가 원주민 인디언들의 마을에서 서양의 범주로 병합되는 시발점이 되는 지역이다. 그런데 막상 둘러보니 그 유명세에 비하여 오늘같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에 볼 만한 관광명소로는 기대 밖이었다. 역사 공부를 통해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중세 유럽 대륙의 종교개혁 회오리 속에서 외견상 평온을 유지하고 있던 영국에서도 위클리프(John Wycliff)등의 개혁 바람과 대륙으로부터 거세게 밀려드는 인문주의 물결을 타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고,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머리를 들고 있었다. 이때 공교롭게도 헨리8세 국왕이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교황의 조치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국왕이 로마교황을 대신하여 영국 교회의 최고지도자임을 선포하는 ‘수장령’을 발표함으로써 비정상적 동기이지만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1563년 국교회(Anglican church)가 수립되었지만 교직 제도는 여전히 로마가톨릭의 경직적으로 군림하는 통치체제를 그대로 영국으로 옮겨놓은 것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봉건적 교회 질서를 타파하고 도덕적 신앙적 순수함을 추구하면서 개인의 신앙 양심을 지켜나가기 위한 청교도 운동이 일어나면서 국왕중심의 국교회에 대한 비판과 개혁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개혁적 염원이 견고한 교회체제와 정치체제를 타파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오히려 교회와 정부로부터 박해가 날로 심화되어 경제적 제재와 투옥으로 이어져 나갔다. 결국 일부 청교도들은 서서히 영국에서의 교회개혁을 포기하고 별도의 새 교회, 새 사회를 건설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1608년 일단의 청교도들이 중대한 결단을 내리고 모국인 영국을 등지고 네덜란드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프로테스탄트 국가였다. 교회와 국가를 버리고 도망가는 청교도들에 대한 영국 정부의 박해는 더 심해질 수 밖에 없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생명을 건 결심을 하고 떠난 사람들이었기에 어려운 여건 속에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십여 년간에 걸쳐 이리저리 경제적 신앙적 안정을 도모했으나 여전히 독립전쟁 중이었던 네덜란드의 정치적 정황과 종교적 이질감 속에서 처음에 추구했던 이상적 신앙사회 모델은 수많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여러모로 돌파구를 모색하다가 당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신대륙 식민지 개척의 대열에 합류하기로 결심한다. 이웃 나라 네덜란드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는데 미개인과 짐승만 사는 땅에 정착하기 위하여 떠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지만 모험을 감행하는 수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1620년 7월22일 네덜란드 라이덴에 거주하던 청교도들은 신앙적 삶의 완성을 향해 비장한 결단을 내리고 신대륙으로 떠나기로 하고 일단 영국으로 향했다. 영국 사우스엠프턴 항구에는 180톤급의 메이플라워호와 작은 스피드웰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120명이 두 대의 배에 탑승하고 대서양 횡단을 단행했으나 스피드웰호가 잦은 고장과 사고로 회항하는 등 출발이 지연되면서 항해의 불편함과 고통에 기진맥진한 사람 20명이 탈락했다. 1620년 9월 6일 드디어 여자들과 아이들을 포함한 102명을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단독으로 영국 플리머스(Plymouth)항을 출발했다. 이들 중에 청교도는 41명뿐이었고 식민지회사에서 식민지 건설을 위해 모집한 사람들과 노무자들이 61명이었다. 우렁찬 찬송과 기도로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면서 두 달을 항해했는데도 육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도대체 아메리카라는 땅이 정말 있기는 한건 지 와락 겁이 날 때도 있었다.
400년 전의 그 메이플라워호를 보기위하여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데 메이플라워호가 떠 있는 선착장으로 갔다. 적지 않은 입장료라 이 배가 오리지날 메이플라워냐고 물으니 모형 제작품이라고 한다. 엄밀한 고증 하에 영국산 목재를 사용해서 원형 그대로 1957년에 복원한 것으로 영국 데번항을 출발하여 이곳 플리머스까지 시험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여기에 전시한 것이란다. 그래서 배의 이름도 메이플라워Ⅱ라고 명명했다. 전장 32.46m, 폭 7.7m, 흘수선이 3.96m에 3개의 돛대를 갖춘 그리 크지 않은 범선이다. 배는 갑판과 아래층 선실, 그 아래층 창고의 3층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갑판에는 높은 돛대에 수많은 밧줄이 얼기설기 매어져 있었고 선장실과 배의 운행과 관련된 각종 부속실이 있었고, 아래층 선실에는 몇 개의 방이 구획되어 있어 침대와 부엌 그리고 가축우리까지 있었다.
어둡고 비좁은 공간에서 커다란 파도에 흔들리면서 지구의 끝에 있다고 하는 미지의 땅을 상상하며 여자들과 아이들을 포함한 102명이 생활했다고 생각하니 바다를 건너는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갔다. 일행이 신대륙에 도착해서 첫 겨울을 나면서 무더기로 죽어 간 것도 두 달여의 항해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는지를 말해 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입장객은 우리 밖에 없고 각 방에는 관광안내인들이 여기저기 옛날 복장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가뜩이나 음습한 선실이 더 구질구질해 보였다. 항해 중에 두 사람이 죽고 세 명의 아기가 태어났다고 한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처절한 고생은 물론 생명을 담보하면서까지 거룩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모든 편안함과 안락함과 재산을 내던지고 상상속의 땅을 찾아나선 이들의 절대 신앙은 얼마나 고결한 것인가?
66일을 극심한 바람과 파도에 시달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탈진한 가운데 11월 11일 드디어 배는 케이프 캇(Cape Cod) 만에 닻을 내렸다. 당초에는 버지니아식민지 소속 허드슨강에 가려던 것인데 풍랑에 밀려 엉뚱한 곳에 내리게 된 것이다. 케이프캇 만은 암초가 많고 파도가 거센 곳으로 긴 항해에 기진맥진한 사람들이 더 이상 항해할 기력도 없어서 예정된 정착지로 가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상륙하려는 순간 뜻하지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 같이 온 식민지 건설노무자들이 자기들은 자기들대로 행동하겠다고 선언했다. 배 위에는 금방 폭동이라도 날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앞으로 이 공동체가 무법천지가 될 가능성이 우려되었다. 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주민자치에 관한 협약서를 기초하고 식민지 건설노무자들과 용인들을 설득하여 서명을 받았다. 이것이 아메리카에서 성문화된 최초의 합의문서로서 주민의 평등권과 자치권 보장에 관한 메이플라워 협약서다.
11월 11일 우선 16명의 무장 선발대가 상륙용 보트를 타고 육지에 내려 이곳 저곳을 정찰하고 약간의 땔나무를 가지고 돌아왔다. 다음 날은 주일이므로 쉬고 13일에는 부녀자들이 밀린 빨래를 가지고 해변으로 내려가 빨래를 했다. 이렇게 약 한 달 동안 낯선 땅을 정찰하면서 땔감과 식량을 조금씩 조달했고, 이곳이 정착하기에 꽤 좋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주변에 경작지로 이용하기에 적합한 땅이 펼쳐져 있었고, 원주민들이 옥수수를 재배하던 흔적도 있었고, 옆에는 큰 강이 흐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강추위가 닥쳐오고 있어서 빨리 거처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2월 11일 정찰대 18명을 선두로 플리머스에 상륙했고, 그들이 ‘플리머스 바위’(Plymouth Rock)라고 이름한 곳에 첫 발을 내디딤으로써 신대륙에서의 새 삶이 시작되었다.
메이플라워 모형전시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청교도들이 처음 미국 땅에 발을 디디며 밟았다는 돌 즉 플리머스 바위가 그리스식 전각 속에 전시되어 있었다.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성도 의문이고 실제로 배에서 내릴 만한 장소에 위치한 것도 아니었다. 상징적 의미를 부각하기 위하여 창안해낸 관광상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래바닥 위에 놓여 있는 타원형의 바위에 ‘1620’이라고 숫자가 음각되어 있다. 독립혁명이 발발하면서 사람들은 바위를 자유의 상징으로 삼으려고 시내 광장으로 옮기다가 바위가 두 동강이 났는데, 1880년에 두 바위를 다시 붙이고 1620이라는 연대를 새겨 넣었다.
눈보라와 비바람 속에 정착촌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 폐렴 또는 폐결핵으로 보이는 질병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첫 겨울이 미처 지나기도 전에 여러 사람이 사망했고, 인디언들의 눈을 피해 시체를 밤에 몰래 표지도 없이 묻기도 했다. 3월 말이 되어서야 대여섯 채의 건물이 들어섰을 때에는 거의 절반이 죽고 50명 남짓만 살아남았다. 메이플라워를 타고 온 18명의 기혼 여성 중메이플라워호에서 내려 5명만 살아남았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신앙의 순례였다.
청교도들이 이 땅에 정착해서 살던 마을을 원주민 왐파노악족 인디언들의 집과 함께 모형으로 조성한 플리머스 정착촌(Plymouth Plantation)도 허접하게 꾸며져 있었다. 옥수숫대와 짚풀, 그리고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움막형 집들이 그들의 열악했던 정착 초기 환경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역시 입장객은 거의 없고 입장료만 비싸고 조잡하기 이를 데 없어서 플리머스 방문은 낚인 기분이 들어 건성으로 돌아보고 나왔다.
청교도들은 뜻밖에 사모세트(Samoset)와 스콴토(Squanto)라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인디언을 만나 많은 정보와 도움을 받는다. 사모세트는 원래 메인 지역에 살던 원주민인데 이곳을 탐사하던 영국 탐험대를 따라 뉴펀들랜드까지 동행한 적이 있어 영어를 조금 배운 적이 있는 사람이다. 스콴토는 스페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영국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한 식민회사의 간부집에 고용되었고 그를 따라 뉴잉글랜드로 돌아온 사람이다. 이들을 통하여 플리머스의 본래 지명은 파우툭세트(Pautuxet)라는 것, 1617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이곳에 있던 인디언 촌락민들이 모두 희생되었다는 것, 이 지역의 여러 인디언 부족 중에서 최강의 추장은 ‘위대한 추장’이라는 뜻의 마사소이트(Massasoit)라고 불리는 사람으로 플리머스 서남쪽 약 40마일 지점에 위치한 나라간세트(Narragansett)만 일대에 살고 있다는 것도 알려 주었다.
1621년 3월 22일 마사소이트가 스콴토의 안내를 받아 60여명의 전사들과 함께 플리머스를 찾아와 우호협정을 맺고 돌아가기도 했다. 청교도들은 전혀 기대하지 못한 이런 사람들의 호의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내주신 특별한 도구였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이 원주민들은 원주민 방식의 옥수수 재배법, 청어를 비롯한 고기 잡는 법, 단풍나무에서 즙을 채취하는 방법, 노루나 짐승을 사냥하는 법 등을 청교도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여름에 접어들면서 청교도들은 차츰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옥수수는 너무나 잘 익었고 포도도 예상 밖으로 잘 재배되었다. 해안지대 여기저기를 탐색하며 인근의 인디언 원주민들과 모피교역을 하는 여유도 생겼다. 뉴잉글랜드의 가을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옥수수는 대풍이었다. 그들은 10월의 한 날을 감사절(Thanksgiving day)로 정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축제를 열기로 했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어준 마사소이트와 그의 왐파노악(Wampanoag) 전사들도 초대했다. 감사 축제는 실로 오랜만에 경험하는 흥겨움 속에 진행되었다. 거위, 사슴, 오리, 바닷가재 등으로 만든 요리에 옥수수 빵, 장어 파이, 신선한 야채, 그리고 야생 자두, 딸기 등 푸짐한 음식과 과일, 거기에다 포도주와 야생 칠면조 고기까지 곁들인 흥겨운 잔치에 손님들은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흠뻑 빠져버렸다. 처음 맛보는 음식과 달콤한 포도주에 취한 인디언들은 사흘이 지나서야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오늘날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되었으며, 이 전통이 계속 이어져서 1863년 링컨 대통령이 국경일로 선포했고, 1941년 연방의회에서 11월 넷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입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리머스 정착지는 험난한 순례자의 길이었다. 옹색하고 보잘 것 없는 이 작은 마을을 지금의 캐나다 동부지역에 진출한 프랑스인들과 지금의 올바니(Albany)에서 뉴욕에 이르는 허드슨 강변에 식민지를 개척한 네덜란드인들이 위협해왔다. 또 파메트(Pamet), 나라간세트(Narragansett), 모헤건(Mohegan), 페코트(Pequot), 마사추세트(Massachusett) 그리고 나우세트(Nauset)등 여러 원주민 부족들이 사방으로 에워싸고 있는 것도 위협적이어서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일년 뒤인 1621년 11월 11일 기쁨과 용기를 싣고 포춘호가 영국에서 35명의 남녀 어른들을 태우고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이들 중에는 일 년 전에 먼저 온 정착민들의 가족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반면에 이 배에는 거금을 들여 메이플라워호의 항해를 도와준 식민지회사의 빚을 빨리 갚으라는 독촉장도 같이 실려 왔다. 아직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값이 나갈 만한 충분한 물자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지런히 일해서 어획물, 모피, 목재 등을 구해서 빚을 갚아야 하는데 오히려 날이 갈수록 영국에서 오는 보급품에 대한 채무만 늘어가는 형국이었다.
그렇지만 영국에서 건너 오는 이주자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인구가 점점 증가했고 정착지의 경제도 서서히 발전과 안정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플리머스는 나중에 출발한 매사추세츠 식민지 등에 비하여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뉴잉글랜드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했으며, 아름다운 신앙적 삶의 자세로 깊은 인상을 남긴 순례자들의 조상이 되었다.
돌돌 말린 고사리 순 모양으로 뻗어나간 케이프 캇은 알통을 자랑하듯 팔을 뻗어 주먹을 감아쥔 듯한 특이한 지형이 인상적이다. 일부러 넓게 방파제를 둘러놓은 듯 바다를 막아 형성하고 있는 케이프 캇 만의 안쪽 해안에 자리잡은 플리머스는 이젠 한적한 촌락으로 역사적 자부심을 관광자원삼아 살아가고 있는 쇠락한 곳이었다.
한 가지 부연할 것은 플리머스 정착지 초기에 상호 우호관계를 유지해오던 왐파노악(Wampanoag) 인디언 부족과 1675년부터 1678년까지 소위 ‘필립왕의 전쟁’(King Philip's War)이라고 하는 끔찍한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 식민지들의 걷잡을 수 없는 팽창정책에 위협을 느껴 오던 다섯 개의 다른 인디언 부족들이 여기에 공동으로 참여하면서 전쟁은 더욱 확대되었다. 당시 왐파노악 부족의 지도자는 필립이었다. 이 전쟁은 하도 규모가 커서 가히 뉴잉글랜드 식민지의 존속 자체를 위협할 만한 사건이었다. 매사추세츠와 코네티컷을 중심으로 한 뉴잉글랜드동맹의 결속된 힘이 바탕이 되어 결국 식민지 측의 승리로 타결되기는 했지만, 전쟁의 대가는 양쪽 모두에게 거의 치명적이었다. 퓨리턴 식민지들은 막대한 전쟁 비용과 인명의 손실을 입었으며, 열두 개의 정착지는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원주민들이 입은 피해가 그보다 훨씬 더 컸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비가 계속 내리기 때문에 불편해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가 없어서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나서 일찍 숙소를 정하고 쉬기로 마음을 먹었다. 프리머스에서 콩코드까지 이동거리 60마일, 소요시간 1시간 10분이다. 주도 MA-3번 북향길을 따라 가다가 주간고속도로 95번 북향길에 합류해서 간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케이프 캇(Cape Cod)에서 하루, 말사스 포도원(Martha's Vineyard)과 낸투켓(Nantucket)에서 하루, 프로비던스( Providence)와 블록섬(Block Island)에서 하루씩 묵어간다면 멋있는 여행이 될 텐데 시간이 부족해서 건너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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