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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ENGLAND

보스턴2 - 프리덤 트레일

약 4km 정도의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의 출발점은 보스턴 커먼(Boston Common)이다. 요즘에는 흔히 보는 그저 그런 공원이지만 미국 최초의 공공 공원으로 1634년에 조성되었다는 역사성이 있다. 청교도들은 이곳을 방목장으로, 군사훈련장으로 활용하기도 했고, 퀘이커교도와 마녀 처형에서부터 독립혁명기의 수많은 항쟁의 집회를 거쳐 최근의 반전 데모에 이르기까지 보스턴의 온갖 영욕의 역사가 이곳에서 진행되어왔다. 독립전쟁 중에는 콩코드까지 출동했던 영국군의 주둔 캠프로 사용되기도 했다. 오늘도 무슨 NGO 행사인 듯 너른 잔디밭 곳곳에는 대형 천막이 자리 잡고 사람들이 이리저리 오가고 있으며, 하늘에는 오색 풍선이 줄에 매달려 있고,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무대에서는 기타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이들과 구경하는 이들이 둘러서 있고, 곳곳에 옛날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북을 치며 행진하고 있다.

공원 옆 비콘 언덕 위 매사추세츠 주청사에선 황금빛 돔이 붉은 벽돌 집 이층에 도열한 흰 코린트식 열주 위에서 장중하게 반짝이고 있다. 휴일이라 청사 철문은 굳게 잠겨있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으나 청사 내벽은 매사추세츠의 역사를 벽화로 장식했고, 그레이트 홀에는 매사추세츠주의 351개 시를 상징하는 깃발들이 도열되어 있단다.

공원 끝자락 지하철역 앞에 우아하고 좁다란 하얀 첨탑을 가진 파크스트리트 교회(Park Street Church)가 있는데, 미국 국가가 처음으로 이 교회에서 불려졌고, 1831년에 교회 강단으로부터 노예제 반대 성명을 발표한 곳이다. 마침 주일이어서 예배에 참석했는데 성찬식까지 참여할 수 있었다. 교회 옆 그래너리 묘지 (Granary Burying Ground) 에는 독립선언서 서명자 세 명(존 핸콕, 사무엘 애덤스, 로버트 패인)을 포함하여 독립전쟁의 영웅들과 보스턴 학살의 희생자 등과 벤저민 프랭클린의 부모들이 묻혀있다.

묘지를 나와서 트레몬트가를 왼쪽으로 따라가다가 바로 다음 코너에서 오른쪽으로 꺽어 스쿨 스트리트로 들어서면 육중한 석조 건물인 킹스교회(King's Church)가 보인다. 1688년 영국 왕 제임스2세의 명령으로 보스턴에 처음 세워진 영국 국교회 건물이다. 영국 국교회를 반대하여 생명을 걸고 멀고 험한 미지의 대륙으로 떠나왔던 청교도들은 당연히 국교회의 건립을 열열히 반대하였으나, 청교도 자치 식민지를 폐지하고 국왕 직할 식민지로 재편하여 총독을 파견하고 왕권강화 정책을 편 국왕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당초에는 목조 건물이었으나 1750년경에 현재와 같은 우아한 인테리어를 간직한 화강암 교회당으로 개축되었다. 독립전쟁 중에 대부분의 왕권파 교인들은 영국이나 캐나다 노바스코시아로 떠나갔고, 1782년에 다시 문을 열어 신학적으로는 유니테리언 교회를 따르고 의식은 국교회를 따르는 절충식 교회가 되었다. 킹스교회 옆에 또 하나의 작은 묘지공원이 있다. 1630년 이곳에 처음 정착한 청교도들이 곧바로 조성한 보스턴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묘지이다. 이곳에 매사추세츠 식민지 건설의 주역이자 최고의 지도자였던 존 윈스롭의 묘가 있다. 국교회가 싫어서 목숨을 걸고 온갖 고생을 하며 식민지를 개척하였는데 죽어서는 다시 국교회 옆 묘지에 누워있는 아이러니가 새삼스럽다. 국교회 건설을 반대한 청교도들이 교회를 지을 부지를 팔지 않고 버티자 할 수 없이 동네 공동묘지 옆에다 국교회를 건축했기 때문이다.

다시 붉은 트레일선을 따라 가니 작은 벽돌 건물인 올드코너 서점이 있다. 1704년에 창간된 식민지 최초의 신문 ‘뉴스레터’, 1719년에 설립되어 독립혁명 기간 중 영국 정부 측을 비판한 논설들을 게재하여 혁명의 불씨를 살려나간 ‘보스턴 가제트’ 등의 팜플렛이 이곳에서 출판되었다. 이름은 서점이지만 말하자면 인쇄소 겸 출판사이다. 19세기 초엽에는 에머슨, 소로우, 호손 등 콩코드 문인들의 작품을 출판한 ‘티크너와 필즈’ 출판사가 이곳에 있었다.

다음에는 교회 건물 처럼 첨탑이 있는 올드 사우스 집회소(Old South Meeting House)가 나온다. 영국의 차 과세에 항거하기로 결의한 장소로 유명하다. 1763년 북아메리카 식민지 지배권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7년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드디어 유럽을 선도하는 대제국으로 발돋움하였으나, 막대한 전비 지출로 부채더미에 올라 앉게되자 식민지에 각종 세금을 부과하여 재정수입을 증대하려고 했다. 식민지에 설탕세, 인지세, 차세 등을 부과하여 재정적 난관을 타개하려는 영국 정부에 대하여 식민지인들은 거세게 항의하며 시위를 이어나갔다. 1773년 12월 영국 동인도 회사로부터 수입한 차를 실은 세 척의 배가 보스턴항에 입항했다. 보스턴 식민지인들은 총독에게 이 배를 그대로 영국으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총독이 이를 거부하자, 식민지인들은 이곳 올드 사우스 집회소에 모여 총독과 영국 정부를 성토한 다음, 인디언 복장을 하고 선창으로 달려가 정박하고 있던 배에 난입하여 수백 상자의 차를 바다에 내던져 버렸다. 이것이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이다. 당시 보스턴 인구의 3분의 1에 육박하는 5천명이 넘는 군중이 이곳에 모여들어 혁명 지도자들의 사자후를 들으며 성토와 시위를 이어나갔던 곳이다.

다음에 만나는 것이 붉은 벽돌로 단아하게 지은 3층 건물에 3층의 흰 첨탑을 얹은 옛날 주청사(Old State House)이다. 원래 읍 청사(Town House) 자리였는데, 1711년 화재로 전소된 다음 1712년에 새로 지어 의사당 겸 주지사 청사로 쓰던 건물로서 보스턴에서 공공건물로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의 하나다. 식민지 당시에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대개 지역사회 지도자로서 공동체의 행정을 맡으면서 신앙을 제일로 앞세우던 시기여서 그랬는지 행정 청사들이 교회건물과 비슷하고 첨탑까지 달려있다. 이 건물의 오른편 교차로 한 가운데가 1770년 영국 주둔군의 발포로 5명이 희생된 보스턴 대학살의 현장이며 1776년 독립선언서가 보스턴 사람들에게 낭독된 발코니가 유명하다. 보스턴 대학살은 계속되는 식민지 과세로 본국 정부에 대한 불신과 긴장이 고조되면서, 항의집회에 참석한 사람들과 세관을 경비하고 있던 영국군 병사 사이에 언쟁이 발생하고 이 와중에 성난 군중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낀 영국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식민지인 5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본국 정부에 대한 반감이 식민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독립 후 청사는 비콘힐의 신청사로 옮겨갔다.

다시 콩그레스가를 곧장 따라가니 패닐홀(Faneuil Hall)이다. 피터 패닐이 보스턴시에 기증한 아름다운 건물로서, 아래층은 가게로 쓰고 윗층은 집회장으로 사용하여 자유의 산실 역할을 한 곳이다. 갑자기 생기가 돌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패닐홀 앞에 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재래시장을 재개발한 퀸시 시장(Quincy Market)이 있다. 홀 앞에는 독립혁명을 주도한 사무엘 애덤스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의 기단 한 쪽에 "부패와 두려움을 모르는 정치가(A stateman, incorruptible and fearless)"라고 새겨있다.

 

 

<퀸시 시장> 패닐홀 앞에 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재래시장을 재개발한 퀸시 시장이 있다.

 

 

약간은 지루한 미국 역사 탐방을 하는 중에 만난 시장이 반가웠다. 두 개의 긴 건물로 된 시장 안으로 들어서니 다양한 스낵 음식과 활기찬 시장분위기와 이벤트를 볼 수 있는 즐거운 장터가 있다. 이리 저리 기웃거리며 호객하는 상인들과 길게 줄을 서서 이것 저것 골라 먹으며 즐거워하는 관광객 사이를 삐집고 다녔다. 그런데 울각시는 역시 음식 박사다. 뉴잉글랜드 지방에는 차우더가 유명하다며 나는 듣도 보도 못한 차우더 가게로 끌고 간다. 역시 차우더 가게 앞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사람들이 그릇 같이 속이 빈 빵(Bread Boul)에 차우더를 붓고 빵뚜껑을 덮어서 들고 간다. 우리도 이 재미있는 빵그릇에 클램 차우더를 채워 달래서 2층 식사 테이블로 가서 빵그릇을 찢어 차우더를 찍어 먹으며 아픈 다리도 쉬고 점심도 때웠다. 클램 차우더란게 먹어보니 대합조개 크림스프라고 할 수 있겠다. 시장 곳곳에서 들리는 상인들의 목청 높인 호객 소리가 기운을 돋궈주기도 하고, 길 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는 손님들에게 포장지를 묶어 머리에 높이 씌워주고 아이스크림을 먹게 해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서로를 쳐다보며 깔깔대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클램 차우더> 그릇 같이 속이 빈 빵(Bread Boul)에 차우더를 붓고 빵뚜껑을 덮어서 들고 간다.

 

 

길 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는 손님들에게 포장지를 묶어 머리에 높이 씌워주고 아이스크림을 먹게 해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서로를 쳐다보며 깔깔대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다시 붉은 트레일 선을 찾아서 따라 가니 독립전쟁 영웅의 집 폴 리비어의 집(Paul Revere House)이 나온다. 리비어는 독립전쟁 당시 은세공업자였는데, 독립전쟁이 발발하기 전날 보스턴에서 찰스강을 건너 콩코드까지 밤을 새워 말을 달려가 민병대에게 영국군의 진격 사실을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마침내 민병대의 승리를 이끌어내서 유명하여졌다. 메신저 즉 전령의 역할이 이같이 위대한 영웅적 행위로 부각되는 경우는 드물 것 같다. 그는 또 보스턴 대학살이 터지자 식민지에 대한 본국 정부의 만행을 판화로 제작하여 곳곳에 유포시켜 식민지 사회의 독립의식 고취에 큰 역할을 했다. 갈 길이 바쁜 우리는 리비어의 집 관람은 건너 뛰고 올드노스 교회(Old North Church)로 갔다.

노스엔드(North End) 부둣가에 가까운 올드노스 교회는 보스턴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건물이다. 1775년 4월 18일 밤 영국 주둔군이 렉싱턴과 콩코드의 민병대를 급습하려고 출동 준비를 하자, 민병대 연락병 리비어는 영국 주둔군이 찰스강을 이용해 수로로 출발할 경우에는 교회 첨탑에 등불을 2개, 육로로 행군할 경우에는 등불을 1개만 걸라고 교회 종지기에게 부탁하고 말을 달려 콩코드로 달려가서 첩보를 전달함으로써 독립전쟁의 첫 전투에서 민병대가 승리할 수 있었다. 당시 올드노스 교회에 걸렸던 등불은 ‘자유의 등불’(Liberty Light)로 명명되어 콩코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교회 안에 들어가니 조지안식 교회 인테리어로서 좌석을 헌금을 받고 가족 지정석(pew)으로 임대하여 낮은 흰 칸막이를 할 수 있게 하고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에게는 큰 면적을 할당하여 개인 취향에 따라 칸막이 장식을 할 수도 있게 한 것이 특이했다. 교회 앞에는 리비어의 말을 탄 동상이 양 옆에 커다란 수목들을 나란히 도열시킨 채 서 있다.

 

헌금을 받고 가족 지정석(pew)을 전용석으로 임대하여 낮은 흰 칸막이를 할 수 있게 하고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에게는 큰 면적을 할당하여 개인 취향에 따라 칸막이 장식을 할 수도 있게 한 것이 특이했다

 

찰스강을 건너는 찰스타운 브릿지는 철난간이 새까맣게 녹슬어 흉물같이 보이는데도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며 사용하고 있어서 이들의 역사 보존 의식에 감탄했다.

노스엔드 부둣가의 끝자락에 가면 1797년에 이곳 보스턴에서 오크 나무로 건조한 거대한 전함 USS 컨스티튜션(Constitution)호가 건너다 보인다. 이 배는 33전 무패의 무적함대이며 1812년 영국과의 전쟁에서 영국 군함의 집중적인 포격에도 거뜬히 버티자 “저 배는 철갑선이다”라고 외쳤다고 해서 ‘Old Ironsides'라는 별명을 얻었단다. 현재 바다에 떠있는 배중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배라는데, 배 안을 둘러보려면 신분증 제시는 물론 주머니를 다 털고 혁대까지 풀고 전자검사대를 통과하는 부산을 떨어야 한다. 갑판 위로 솟은 세 개의 거대한 돛대와 연결된 수백개의 팽팽한 줄들이 엉키지도 않고 기하학적 무늬를 만들고 있는 웅장한 목조 선박은 죽고 죽이는 그 험악한 과거의 역할과는 무관하게 멋있는 신사처럼 보였다.

 

<USS 컨스티튜션(Constitution)호> 1797년에 오크 나무로 건조한 거대한 전함으로서 33전 무패의 무적함대이며 현재 바다에 떠있는 배중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배라고 한다

프리덤 트레일의 종점 벙커힐 기념비(Bunker Hill Monument)는 67m의 화강석 오벨리스크 탑으로 독립전쟁 발발 초기의 전투중 가장 치열했던 벙커힐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 탑은 돈 많은 사람들의 거금 희사는 사양하고 일반 사람들이 내는 작은 성금만을 십시일반으로 거둬서 건립하느라 17년이나 결려서 1843년에 완공되었다. 벙커힐 전투는 콩코드와 렉싱턴에서 패퇴한 영국군이 보스턴으로 철수하여 찰스강을 경계로 식민지군과 장기간 대치하던 중 발발했다. 1775년 6월 식민지군에서 영국군을 압박하기 위하여 영국군 주둔 항구에 가까운 브리즈힐에 약 50m에 걸쳐 진지를 구축하자 보급품을 공급받는 루트인 항구마저 뺏길 위험에 처한 영국군이 우세한 화력을 총동원하여 공격함으로써 진지를 점령하고 식민지군을 벙커힐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영국군의 승리는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한 것이었다. 영국군 전투 병력의 약 40퍼센트에 육박하는 1,054명의 사상자가 났고, 식민지군은 140명이 사망하고 301명이 부상당했다. 전투에서 식민지군은 결국 졌지만, 영국군에 큰 타격을 줌으로써 그 후 애국시민군의 저항의지를 오히려 키워준 전투라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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