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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튀르키예 - 투르크족의 나라

투르크족의 西進

오늘날 튀르키예의 인구는 투르크족이 70~75%, 쿠르드족 20%이다. 원래 그리스, 로마인의 땅이었던 튀르키예 땅을 어떻게 투르크족이 차지하게 되었는 지를 알아보자.

기원전 2세기에 흉노가 등장하여 몽골 초원에 유라시아 최초의 유목 제국을 세웠다. 막강한 흉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았고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흉노에게 막대한 조공을 바쳤다. 결국 한무제의 공격으로 흉노가 약화되었고 이후 200여 년에 걸쳐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다가 4세기에 갑자기 강성해지며 유럽 전역을 침략하였다. 이들 흉노를 유럽에서는 훈족이라 하였다. 오늘날의 헝가리의 조상이 되었다. 이로 인해 게르만의 민족 대이동이 일어났고 결국 서로마의 멸망을 불러왔다.

 

투르크족의 조상이 한때 우리나라 고구려와 고대 중국에 국경을 맞대고 있던 북쪽 대륙의 돌궐족이다. 이들은 강력한 중국과 고구려를 침략하며 남진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서기 6세기 경 유럽으로 이동한 흉노가 비운 내륙 아시아의 대초원지대로 서진하여 유목 생활을 하였다. 이후 1000년 동안 일련의 정복 활동을 통해 서진하며 내륙 아시아에서 지중해까지 뻗은 제국을 건설했다.  투르크의 한자어가 돌궐(突闕)이다.  문자가 없던 다른 유목 민족들과는 달리 돌궐족은 자신의 문자를 사용했다. 실크로드를 장악한 돌궐은 중계무역으로 부를 쌓았으나, 내분으로 200여 년만에 힘을 잃었다.

 

오구즈 투르크

투르크 유목 부족 중 대초원지대의 서쪽 트란스옥시아나(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남서부)로 이동해 정착했던 부족이 오구즈 투르크다. 

 

셀주크 투르크 (11세기 ~ 13세기)

오구즈 투르크족 중 일부가 남하하여 이란에 이르러서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문화를 두루 수용하고 독자적 투르크 왕국을 세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11세기에 이르러 이들은 이슬람 세계의 용병으로 활동하다가 마침내는 용병의 지도자인 셀주크 투르크인이 이슬람교의 술탄이 되었다. 셀주크족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그다드를 비롯한 아나톨리아 지방, 이라크, 이란 영토를 거의 차지했다.

서기 1071년 셀주크족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을 패퇴시키고 곧 이어 새로운 나라 룸왕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1097년경에 제1차 십자군에게 패하고 아나톨리아 중남부의 콘야에 수도를 이전하고 화려한 이슬람교 사원, 학교, 교역 중심지를 건설하면서 문화 전성기를 구가했다. 

12세기에 이르러 서쪽의 십자군과 동쪽의 몽골족의 압박으로 움츠러들다가 1243년 몽골군에 패하고 마침내 1261년에 그 세력이 소멸하고 말았다. 

 

오스만 투르크 (13세기 ~ 20세기)

13세기에 이란에 머물던 오구즈 투르크의 또다른 일파가 몽골족에게 쫒겨서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내몰렸으나 결국 이 지역의 토착 세력으로 성장했다. 지도자 오스만 1세의 이름을 따서 오스만투르족으로 불렸다. 

 

오스만 투르크의 성장

 

오스만 1세 (1270-1326년)

예니체리 창설 - 영토 확장 담당 정예 전투부대

1304년, 마르마라해의 아시아 쪽 땅 모두 점령

1326년, 부르사 수도 정도.

 

1350년,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발칸반도로 진출.

1361년, 아드리아노플(현 에디르네)로 수도 천도.

 

무라드 1세 (오스만 1세의 손자, )

1389년, 세르비아와 발칸 지역 정복.

 

베야지트 1세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대규모 십자군 격퇴.

1397년, 동로마 콘스탄티노플 포위

1402년, 앙카라 인근 평원 전투에서 몽골군(타타르족)에게 대패하고, 콘스탄티노플 포위에서 철수.

 

무라드 2세

 

메흐메트 2세(1432-1481년)

1452년, 루멜리 히사르 요새 건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동로마 멸망.

1453년, 콘스탄티노플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고 수도 천도.

 

* 루멜리 히사르 성

루멜리 히사르 성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 성 공격에 사용한 대포 돌 탄환 (루멜리 히사르 성 입구)

 

루멜리 히사르 성은 2년간 대보수 공사에 들어가서 입장하지 못했다.

 

* 톱카프궁전

 1475~1478년 동로마 제국의 성곽이 있었던 첫 번째 언덕 북쪽 끝, 보스포러스 해협과 마르마라해, 골든혼(金角灣)이 합류하는 지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1850년대  19세기 마흐무트 2세 때까지 술탄이 바뀔 때마다  증축과 보수가 이루어지면서 약 380여 년간 오스만 제국의 정궁으로 역할을 했다. 궁전 입구 양쪽에 대포가 배치된 데 연유하여 톱카프 궁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톱’은 대포라는 뜻이고 ‘카프’는 문이라는 뜻이다.

톱카프궁전

 

 

 

 

쉴레이만 대제 (1520-1566년) - 오스만 투르크의 전성기

쉴레이마니예 모스크를 비롯한 웅장한 궁전과 이슬람교 사원 건설

걸출한 건축가 시난의 활동

 

* 쉴레이마니예 모스크

쉴레이만 1세의 명에 의해 당시의 궁정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설계한 오스만 건축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불린다 , 1550년에 착공해 7년의 세월을 걸쳐 1557년에 완성했다. 이스탄불의 구시가지에 있는 7개의 언덕 중 하나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어 에미뇌뉘 선착장이나 건너편 갈라타 타워에서 보면 언덕 위에 우뚝 솟아있다. 

 

16세기 - 17세기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이라크, 흑해, 우크라이나, 헝가리까지 정복

1683년,  빈 포위 실패하고 퇴각 - 커피를 유럽에 전파하는 계기가 됨.

 

* 블루모스크 (술탄아흐멧 모스크)
술탄 아흐멧 1세가 성소피아 성당의 건축양식을 모방해 1616년 세운 이슬람 사원이다. 성소피아성당이라는 기독교 최고의 건축물에 대응하려는 목적으로 성당 바로 앞에  이슬람 최고의 성지를 조성했다. 

 

18세기

내부 통제력 약화, 

 

 

19세기

 

*돌마바흐체 궁전

1843년 압둘메지트 1세가 낡고 불편한 톱카프 궁전 대신 새로 유럽식 궁전을 건설할 것을 명령, 13년간의 공사 끝에 1856년 완공되었다. '유럽의 환자'라는 조롱을 받으며 기울어가던 나라에서 건축비 5백만 리라, 금으로 치면 약 35톤으로,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19억 달러를 궁전 건설에 쏟아부었고, 유럽에서 보내온 수많은 헌상품의 진열과 호화로운 대리석 기둥과 벽들로 사치의 극을 보여준다. 결국 오스만은 급격히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관광객들의 눈을 휘둥그레하게 하며 관광 자원으로서 튀르키예의 자랑이 되었다. 

나중에 오스만 제국의 술탄제가 폐지되고  튀르키예 공화국이 수립된 후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방 하나를 집무실 겸 관저로 쓰다가 그의 사망 후에 관광객에게 개방하였다.

 

돌마바흐체 안에 있는 모든 시계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집무를 보는 중에 사망한 1938년 11월 10일, 9시 5분에 맞춰서 멈춰있다.

궁전 정문
돌마바흐체 궁전 세람르크
살타낫문
술탄이 배를 타기 위한 정박장 문
아타튀르크가 쓰던 방, 그의 사망 시간 9시5분에 시계가 정지되어 있다.

 

에게해, 발칸반도,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등지의 영토 상실.

크림 전쟁(1854-1856년)

  - 영국, 프랑스와 함께 러시아와 전쟁 - 러시아 패전

  - 발칸 지역 회복

  - 나이팅게일 간호사

 

술탄 압둘하미드 2세 (  -1909년)

1878년, 러시아와 전쟁 패전으로 발칸반도 상실. 유럽쪽 영토 대부분 상실.

독재와 실정으로 쫒겨남.

 

메흐메트 5세 (압둘하미드 2세의 동생, 1909- )

청년튀르크당과 권력 공유, 정정 불안.

1911-1912년, 리비아의 트리폴리를 이탈리아에게 빼앗김.

1912-1913년,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와의 전쟁 패전으로 유럽쪽 영토는 아드리아노플과 콘스탄티노플만 남음.

 

메흐메트 6세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패전.

1920년, 오스만 제국 해체(세브르 조약)

  -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영국에 양도.

  - 시리아와 레바논 프랑스에 양도.

  - 헤자즈 왕국(현 사우디아라비아) 포기 - 메카 상실.

  - 이즈미르와 튀르키예 인근 에게해의 섬들을 그리스에 양도.

  - 로도스섬과 도데카니사 제도를 이탈리아에 양도.

 

튀르키예 독립

 

아타튀르크

1919년, 삼순 반란의 진압군 대장인 무스타파 케말이 반란군에 가담.

1920년, 국민의회 소집

  - 세브르 조약을 부정하고 앙카라 임시정부 구성

1921년, 오스만 술탄 제도 폐지

1922년, 술탄 메흐메트 6세 의 폐위와 유럽 망명.

 

튀르키예의 독립 전쟁

1921년, 그리스와 전쟁에서 승리

  - 아나톨리아 수복, 세브르 조약 폐기.

1923년, 튀르키예 영토 확정, 그리스와 인구 교환 (로잔 조약)

1923년, 튀르키예공화국  선포

  - 수도 앙카로로 이전.

  - 무스타파 케말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

  - 칼리파 제도 혁파, 이슬람 관련 제도 폐지, 여성 가리개 금지, 아라비아어 추방 튀르키예어 도입, 일부다처제 금지, 여성 선거권 부여

 

영웅 아타튀르크(1881-1938년)

아타튀르크(튀르크인의 아버지)는 나중에 국민의회가 붙인 경칭이고, 본래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이다. 그는 튀르키예 국민 모두에게 존경받는 튀르키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며, 그의 그림과 사진은 관공서, 상점 등 곳곳에 붙어 있고, 거의 모든 광장에 그의 동상이 서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튀르키예 지휘관으로서 연합군을 격퇴시키며 명성을 얻은 탁월한 군인이었다. 전후 1919년 그는 튀르키예의 흑해 연안 도시 삼순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의 명령을 받고 오히려 반란군에 가담하여 무능한 술탄에 대항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1920년 앙카라에서 국민의회를 소집하고, 튀르키예 영토를 분할하여 점령한 영국과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맞서 싸웠다. 1921년 임시정부는 오스만 술탄 제도를 폐지했고, 1922년 마지막 술탄 메흐메트 6세는 폐위되어 유럽으로 망명했다. 이즈미르에 거주하는 국민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쳐들어온 그리스와 모든 외국 군대를 몰아내어 1923년 오늘날의 튀르키예 영토가 확정되었고, 튀르키예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과도적 일당통치를 부여받은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은 서구화와 사회 경제적 개혁을 추진하여 절대봉건군주국에서 현대적 민주공화국으로 나라를 변신시켰다.  그는 1938년 이스탄불의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귈하네 공원 안 아타튀르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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