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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튀르키예 - 동로마 제국

이스탄불은 동로마제국 천년과 오스만투르크제국 오백년의 대제국의 역사를 간직한 세계의 최고의 보물 수장고라 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의 분열

로마는 영국에서 지중해, 중동 지방, 그리고 북아프리카를 포함하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영토가 넓은 만큼 외적의 침략과 내부적 불안정에 시달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영토가 너무 커서 한 사람이 다 통치할 수는 없다고 보았고, 로마를 두 명의 정제와 두 명의 부제가 나누어 다스리는 4두 정치체제를 도입하고 제국의 영토를 동방과 서방으로 나누었다. 그가 퇴위하자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두 체제는 무너트리고 황제 세습제를 세웠다. 이어서 313년에 발표한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했다. 

 

주요 황제들

 

콘스탄티누스 1세 (306 - 337년) - 기독교 공인, 콘스탄티노풀리스로 천도

4세기 초,  로마 제국에 비교적 심각한 우환거리였던 동방의 사산 제국과 다뉴브강 북부의 고트족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콘스탄티누스는 324년에 수도를 유라시아의 교차점인 그리스 도시 비잔틴으로 옮기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 (379 - 395년) - 기독교 국교화

기독교를 제국의 국교로 선포하고 다른 종교 행위는 금지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 (408 - 450년) - 테오도시우스 성벽 건

* 테오도시우스 성벽

7살의 나이로 즉위한 테오도시우스 2세 시대에 413년부터 422년까지 성벽을 쌓았다. 해자와 내성벽(흉벽과 너비가 2미터 높이가 5미터), 외성벽(너비 5미터 높이 12미터)의 삼중 구조로 축성했다. 내성벽과 외성벽에는 각각 96개 씩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 적을 견제하기에 용이했다. 이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체 21km를 감싸고 있는데, 육로에 면한 6km정도는 삼중 구조로, 해안가의 성벽은 단일구조였다.

 

제국이 침략을 받아 수도 면전까지 영토가 유린되었다 해도 이 성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군대는 14세기까지 아무도 없었을 만큼 거의 천년 동안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1453년 15만 대군을 몰고와 동로마를 멸망시킨 투르크군도 처음에는 이 성벽을 넘지 못하고 한 달 반 가량을 성내의 7천 남짓한 군대를 상대로 고전했다. 투르크군은 결국 성벽을 넘지 못하고 다른 전술로 데오도시우스성에 진입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1453년 투르크의 메흐메트 2세에게 함락될 때까지 데오도시우스 성벽은 23차례의 대규모 공격을 받아 위태로운 상황을 맞은 적이 많았지만 비잔틴은 결국 외적을 격퇴하며 콘스탄티노플을 지켜냈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476년)

4세기 유라시아 초원 국가를 이루던 흉노족(훈족)이 유럽으로 대이동한다. 흉노족의 유럽 유입은 유럽 내의 여러 종족의 연쇄적인 대이동을 일으킨다. 376년 흉노에게 쫒긴 고트족 난민은 동로마로 이동한다. 흉노는 395년 로마 제국 침입을 강행하고, 398년 사산 제국을 침공한다. 이어 405-408년 흉노가 북부 유럽의 게르만족을 밀어내자 게르만 난민은 로마로 대이동을 한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자 옛 흉노제국의 중추였던 고트인이 서로마 중앙으로 방향을 틀어 그들 대신 무너진 제국을 떠받쳤지만 결국 서로마는 476년 종식을 선언하게 된다. 동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로마 제국을 통일한 것으로 정치적으로 해석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527 - 565년) - 제국의 전성기

고토 수복 전쟁을 통해 서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서지중해 일대를 회복함으로써 최대 영토를 확보했다. 이때 동로마 제국은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안달루시아, 시칠리아, 사르데냐를 점령하고 2세기 동안 이 지역을 다스렸다. 유스티니아누스 제국 시기에는 도시가 1,500여 개에 달하는 전성기를 누렸다.

529~534년,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반포

즉위 초인 529~534년, 조정의 신하들에게 로마법을 수정하여 편찬할 것을 명령하여 <로마 민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을 공표한다. 법전이 반포된 뒤 황제의 법령은 그리스어로 발표되는데 이는 '신법령습, novels'으로 불렸다. 절반은 라틴어, 절반은 그리스어로 된 그의 법령 모음집이 바로 그 유명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Codex Justinianus)이다. 541~542년, 역병의 발생으로 도시 전체 인구의 40%가 감소하는 대재앙이 있었다.
537~752년, 이탈리아를 다시 정복하면서 로마 교황청 역사에서 '비잔틴이 교황을 임명하는 시대(537~752)'를 열었다.

537년 하기아 소피아를 재건 완공했다.

 

* 히포드럼 경기장과 니카 반란

블루모스크에서 아야소피아 모스크(성소피아성당)까지 이르는 구역엔 ‘말의 광장’이라는 뜻의 히포드럼광장이 있다. 네 마리의 말이 한 조가 되어 수레를 이끄는 대전차 경기장이 있던 자리이다. 40줄의 계단식 좌석에 4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이 경기장에선 대전차 경주 뿐 만 아니라, 정치집회, 검투사 대결 등도 했다.

공무원 출신이었던 유스티니아누스는 초창기 황위가 그리 안정적이지 않았던 탓에 532년 수도의 경기당競技黨(경기단체)이 '니카 반란Nika Riots (승리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하마터면 제위를 거의 잃을 뻔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마차경주장 히포드롬Hippodrome은 수만 명을 수용할 수 있어서 폭동 촉발의 온상이었다. 수도首都의 경기당竟技堂은 고대 도시국가 시민대회의 성격을 지닌 단체로 원래는 각 지역이 구성한 경주용 전차부대가 대표적이었다. 훗날 이는 도시 자치 성격의 민중 단체로 변모하는데 내부적으로는 민사民事 와 군사軍事의 두 영역으로 나뉘어 민사는 치안 유지를 도모하고 군사 영역은 도시 방어에 협조했다.

경기당은 훗날 배후에 있는 반 정권 야심가에 의해 조종되기도 하며 수도 폭민 정치를 보여주는 모델이 되었다. 황제들은 통상 즉위 후 경기장에서 군사들과 백성들에게서 환호를 받지만, 정부와 백성 사이에 충돌이 발생할 때 황제가 경기장에 나타나 군중의 반대의견을 청취하여 관리의 임명과 면직을 결정하기도 했다. 황제가 민심을 잃으면 심할 경우 경기당과 기타 세력 연합에 의해 정권이 전복되기도 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니카 반란'을 피해 도주하고자 했으나 황후 테오도라가 의연하게 “폐하가 입은 황제의 옷은 가장 고귀한 수의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위기에 맞설 것을 권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왕조는 그와 테오도라의 공동 통치 정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정은 폭동으로 훼파된 성 소피아 성당Hagia Sophia basilica을 재건하였다. 

 

* 아야 소피아

아야 소피아는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서 처음 건립되었다가 소실되었다. 소실한 지 약 11년 후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재건되어 415년 축성되었으나 532년 니카의 반란 도중 일어난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즉시 재건을 명령하여 537년 하기아 소피아를 완공했다. 완공식을 마치고 성당에 들어간 유스티니아누스는 말했다. “솔로몬이여, 제가 당신을 이겼습니다.”그러나 워낙 빠르게 공사를 마무리한 탓에 내부 모자이크 공사는 몇십 년이 지난 유스티니아누스 2세 때 가서야 완성되었다.

성당은 가로 77미터, 세로 79미터로, 가운데에는 지름 32미터, 높이 62미터의 돔 천장이 있었고, 돔의 테두리에 있는 얇은 접시 모양 받침에는 창문 40개가 있었으며, 돔과 벽은 모자이크 성화들로 장식됐다. 돔과 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천국에 온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황후 테오도라를 사랑했던 황제는 기둥, 제단 등 수십 곳에 두 사람 이름을 함께 새겼다.

성당을 짓기 위해 제국 전역에서 기둥과 대리석이 공출되었으며, 심지어 지중해를 건너오기까지 했다. 로마나 에페수스 같은 고대 도시에서 기둥을 빼왔기 때문에, 현재 하기아 소피아를 이루는 기둥들은 건축을 위해 따로 다듬었는데도 서로 각각 다른 크기와 색깔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려 1만 명 넘는 인력이 동원되었다. 

하지만 553년과 557년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고 중앙 돔과 동쪽의 반형 돔에 균열이 생겼고, 결국 558년 중앙 돔이 완전히 무너졌다.  레바논 등에서 거대한 코린트식 기둥 8개가 공수되어 562년 복구를 완료했다. 

726년 레오 3세가 성상 파괴 운동을 벌이면서 모든 성화와 성물을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이를 파괴하라 명했고, 이때 아야 소피아에 있던 인물상과 성상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후로도 성당은 재해로 여러 차례 큰 피해를 입으며 복구와 재건이 이어졌다. 

아야 소피아는 4차 십자군 원정 때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십자군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이후 아야 소피아를 포함한 모든 건물을 무자비하게 약탈했고, 이때 성당 내부에 붙어 있던 황금 모자이크, 보석, 성유물이 유럽으로 대거 반출되었다. 또한 라틴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차지했던 1204년에서 1261년까지 하기아 소피아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활용됐다. 

1261년 동로마 제국 다시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탈환했으나, 성당은 여전히 황폐한 상태로 퇴락되어 있었고 지속적인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였다.  그는 대성당의 흙을 자신의 머리에 뿌려서 정복을 기념했고, 대성당을 몰수해서 모스크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 후 쉴레이만 대제는 아야 소피아 내부 문과 천장, 벽 등에 장식되어 있던 옛 동로마 제국의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를 모두 흰 벽토와 회칠로 덮어버리게 명령하기도 하였다. 이 회칠은 1930년대에 터키 공화국의 감독 아래 다시 벗겨졌다.

술탄 압뒬메지트 1세는 1847년부터 약 2년 동안 아야 소피아를 대대적으 보수 공사하였다. 이때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대한 캘리그라피 원판들이 새로 걸렸다. 이 원판에는 알라, 예언자 무하마드, 4명의 정통 칼리파, 무함마드의 외손자이자 알리의 아들인 하산과 후세인의 이름이 적혀 있다. 

1935년에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고 새로 터키를 건국한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에서 박물관으로 바꾸었다. 바닥에 깔려있던 카펫도 치웠고, 이로 인해 바닥에 장식되어 있던 대리석 옴팔리온도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이 때 오스만 제국 시대의 회칠도 다시 벗겨내 옛 모자이크들이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2019년 에르도안 대통령은 아야 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되돌리고 내부에 있던 동로마 제국 시대의 성화들과 유적들은 커튼이나 융단으로 가려졌다.

4개의 지주 위에 대형 아치를 두었다. 모스크로 바뀐 지금은 관광객은 1층 본당에는 못들어가고, 입구에서 2층으로 바로 올라간다.
성당 천장 모서리엔 성모마리아가 내려다 보는 모습도 그려져 있다. 2층 정중앙 황후의 자리에서 보면, 아래로는 성도들이 있고, 위로는 성모 마리아의 얼굴이 바로 보인다.

 

 

이라클리오스 (610 - 641년)

614년, 예루살렘을 침략, 예수의 '성십자가'를 탈취.

629년, 예루살렘의 '성십자가' 반환

629년,  라틴어를 폐기하고 그리스어를 정부의 공식 언어로 선언.

629년, 군주의 호칭을 라틴어 '아우구스투스Augustus'에서 그리스어인 '바실레우스'로 바꿈.

629년, 사산 제국의 보호국이 됨.

 

레온 3세 (717 - 741년) - 성상 파괴 운동

717년, 우마이야 왕조가 수천 척의 전함과 10만 대군을 동원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으나  뛰어난 명장인 황제 레온 3세의 지휘로 겨우 격퇴했다.

성상 파괴 운동을 주창하며 이콘을 금지하고 성상을 파괴하라 명했으나 제국 전역에서 성상 옹호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종교상 논쟁과 분열이 극심해졌다. 성상 파괴 운동은  843년에  117년만에 종식되었다.

 

바실리오스 2세 (976 - 1025년) - 마케도니아 르네상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후 페르시아와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의 국력은 상당히 소모되었으며, 결국 7세기의 아랍 무슬림들의 침공으로 상당한 영토를 잃어버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슬람 제국의 정복 전쟁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이집트, 시리아와 같은 부유한 속주들을 상실했다. 그러나 바실리오스 2세로  대표되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확장기에 동로마 제국의 영토는 발칸반도 대부분과 남이탈리아, 크레타, 키프로스,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까지 넓혀져 7세기 이후 최대 강역에 달했고, 2세기 동안 지속되는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당시  성상 파괴 운동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는 고전 열풍이 불어닥쳐서 훗날 이탈리아의 문예 부흥에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두카스 왕조 - 아나톨리아 반도 상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튀르크에게 패배하여 아나톨리아 반도를 잃게 되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튀르크족은 아나톨리아에 정착하게 될 발판을 마련하였다.

 

미누엘 1세 (1143 - 1180년) - 제국의 절정기

동로마 제국의 경제력은 절정에 달했고 이때 제국의 영향권은 발칸반도 남부와 소아시아 대부분, 그리고 키프로스와 크레타, 안티오키아에 이르렀다. 이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

 

앙겔로스 왕조 - 함락

황제들의 무능과 내전으로 국력이 약화된 제국은 1204년 제4차 십자군 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약탈당하고 함락되었다. 

 

미하일 8세 (1261 - 1282년) - 몰락

1261년  동로마 제국은 회복되었으나, 이미 그 영향력은 상당히 쇠퇴한 뒤였다. 잦은 전쟁으로 인한 국력 손실로 아나톨리아의 잔존 영토로 밀려들어오는 투르크족을 막지 못했다. 또한 계속되는 내전 역시 국가 재건을 방해했다. 결국 14세기 이후 제국의 영토는 트라키아와 그리스 일부로 축소되었고, 요안니스 5세의 치세를 거치며 완전히 몰락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카, 모레아만이 영토로 남게 되었다. 

 

콘스탄티노스 11세 (1449 - 1453년) - 동로마의 멸망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고 멸망하였다. 

마지막 황제였던는 적군이 도시 성벽을 장악하자 황제의 예복을 벗고 전투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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