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베리(Canterbury)에 있는 쉐이커 교도들의 농장 공동체다. 200년 이상 신앙적 양심을 지키며 검소하게 생활하고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공동 농장에서 공동 작업을 하며 같이 살아온 농장이다. 애석하게도 1주일 후인 5월20일부터 문을 연다. 5월14일부터 이들 고유의 전통 식사를 제공하는 식당을 연다는 기사를 보고 절묘하다며 찾아갔더니 작년 기사였다. 금년에는 농장과 마찬가지로 식당도 5월20일부터 문을 연다고 한다. 맛있는 점심식사를 기대하고 갔다가 헛물만 켰다.
다행히도 가이드투어는 안되지만 농장에 들어가서 둘러보는 것은 괜찮다고 한다. 농장 안에는 공동생활에 필요한 시설들이 200년 이상의 연륜을 자랑하며 늘어서 있다. 숙소와 교회는 물론 각종 작업장 등이 배치되어 있고 주변에 소 방목장, 허브 재배장, 과일나무 고목, 아름다운 호수가 풍경화와 같이 어울려 있다. 밭이 곧 정원이고, 정원이 곧 밭이다. 그래서 텃밭을 키친 가든이라고 부른다. 밭의 구석구석 마다 심어놓고 가꾼 자연스런 꽃과 나무가 밭일로 힘든 농부들의 마음을 향기롭게 쓰다듬어 주었을 것이다. 드넓은 초지가 가득 핀 노란 민들레와 어울려 그림의 신선한 바탕색 역할을 하고 있다. 움푹 파인 땅이 60여m의 길이로 돌담이 둘러쳐져 있어 궁금했는데 소 우사로 쓰다가 불이 난 것을 그대로 두어 돌 벽만 남아있는 것이라고 한다. 단순하고 소박한 집들이지만 구도와 색상의 다양한 변화 때문에 정말 아름답고 깔끔한 인상을 준다. 채소가든에는 여러 가지의 채소가 저마다 문패를 달고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농장의 끝에는 꽤 넓은 연못이 자연스럽게 멋을 발하고 있다. 이 연못을 통하여 채소밭에 필요한 물을 조달한다. 연못 둘레에는 오월을 맞아 다양한 꽃들이 파란 잎새 사이로 방긋방긋 웃으며 손짓한다.
쉐이커 교도들의 당시 생활을 엿보려면 그들이 살던 터전의 주요 건물들의 용도를 잘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서있는 짙은 회색의 이층집이 병원시설(Infirmary, 1811)이다. 정문의 왼쪽에는 커다란 흰색의 이층 창고(Carriage House, 1825)가 있다. 캐리지 하우스 앞에는 하얀 이층집인 형제들의 작업장(Brethren's Shop, 1824)과 치즈, 버터,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낙농 종사 자매들의 집(Creamery, 1905)과 그 뒤편에 하얀 단층의 목수 작업실(Carpenters' Shop, 1806)과 높은 망루가 솟은 초코렛색의 소방서(Fire House, 1908) 그리고 빌리지내 16개 건물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건설한 초코렛색의 발전설비실(Power House, 1910)이 가지런히 위치해 있다.
다시 병원 앞에는 1921년 인필드에서 캔터베리로 단체로 이주해온 쉐이커 여자 노인들을 수용하기 위한 숙소(Enfield House, 1826/1918)가 있다. 인필드 하우스 앞에는 인상적인 빨간 돔의 종루를 이고 있으면서 빌리지 내에서 가장 큰 3층 건물인 기숙사 겸 교회(Dwelling House, 1793/1837)가 기역자로 자리 잡고 있다. 1층에는 고깃간, 거대한 벽돌오븐, 주방설비들과 식당이 있었다. 대부분 건물이 새하얀 판자집인데 유독 황갈색 벽을 가진 건물이 보이는데 이것은 수예.재봉 작업실(Sisters' Shop, 1816)이다. 세월이 점차 지나면서 엄격한 독신주의 신앙공동체 생활과 고된 농사일에 지친 남자들이 점차 빠져나가자 이곳의 여성 봉제품이 공동체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다고 한다. 남자들에게 금욕 생활을 하면서 평생 고된 노동을 하며 일상생활을 하라는 것이 처음부터 지나친 주문이었을 것 같다.
드웰링 하우스옆 길 건너편에 커다란 이층 창고건물(North Shop)이 있는데, 1층은 땔나무 창고, 2층은 직물 작업실로 사용되었다. 창고 뒤에는 자동차 차고와 시럽제조실이 있다. 그 옆에는 커다란 세탁소(laundry, 1795/1907)가 있는데, 이것은 쉐이커 빌리지의 주요 수입원인 섬유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곳이다. 직조실(Spin Shop)과 건조실(Dry House)이 이웃해 있다. 빼곡히 들어서 있는 건물들의 끝자락에 넓은 채소 및 약초밭이 있다.
빌리지의 남단에는 예배당(Meetinghouse, 1792)과 목사관(Ministry shop, 1848) 그리고 사무실(East House, 1810)이 있다. 그리고 북단에는 정문 쪽으로부터 학교(School House, 1823/1863), 마차고(Cart Shed, 1840), 꿀벌집(Bee House) 그리고 땔나무가 가득 들어찬 일곱간 목재창고(Woodshed, 1861)가 있다. 초코렛 색의 목재로 긴 상자 모양으로 지은 단순한 직사각형 형태의 땔감 창고인데도 참 단아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 뒤편으로 백여 마리의 소를 키울 수 있는 반 지하 축사(Cow Barn, 1858)가 있었는데 1973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기초 돌벽만 길게 늘어서 있고 노란 민들레꽃이 무성한 풀 가운데에 피어 색다른 인상을 준다.
퀘이커 교도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쉐이커 교도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퀘이크나 쉐이크나 흔들린다 또는 진동한다는 뜻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쉐이커는 18세기에 영국 신교에서 분파된 신비주의 이단 교파로서 재림 예수를 자처하는 앤 리 (Ann Lee)를 중심으로 이 땅위에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소박한 생활과 열정적 종교의식을 추구했던 것 같다. 18세기 중반에 뉴잉글랜드 지방으로 건너온 쉐이커교는 환상, 예언, 방언, 신유와 같은 개인적 성령체험을 중시하면서 격렬한 춤과 노래로 예배했다. 이들은 창조자 하나님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며, 예수는 하느님이 남성의 몸으로 처음 나타나신 것이며, 앞으로 올 재림예수는 여성의 몸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쉐이커교는 당시 남성 중심의 전통적 교회와는 달리 엄격히 남녀 평등한 교회를 추구했으며, 실질적으로 여성들이 교회의 리더쉽을 형성했다. 최고 집행기구는 남자 장로 2명과 여자 장로 2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을 성적인 것으로 보고 결혼을 하지 않고 처녀성과 동정을 유지하는 것을 중요시 했다. 이미 결혼한 가족도 쉐이커 교도가 되면 가족 관계가 해소되어 별도의 생활을 한다. 교회에도 남녀의 출입문이 따로 있으며 각각 남녀 구별된 자리에 앉는다. 이들의 최고 미덕은 순결, 공동체주의, 죄의 고백이다.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이 없다. 이들은 아이들을 입양해서 키우고 교육시켰다. 고아와 부모 잃은 아이들을 모두 받아 들였다. 이곳의 학교 교육은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 시스템을 갖추어서 인근 마을 사람들이 자녀 교육을 맡기기도 했다. 이곳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아이들은 21세가 되면 이 공동체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세상으로 떠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당시에 평균 약 25 퍼센트 미만의 젊은이는 남고 나머지는 떠났다고 하는데 이 정도면 매우 우수한 잔류율이어서 1840년경에는 공동체 정회원이 오천 명이나 되었다.
쉐이커 교도들은 검소한 생활과 고된 노동으로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다. 청결과 정직 그리고 검소함을 최고의 생활 덕목으로 삼았다. 이들은 과학적인 농장을 운영하면서 자신들의 식량을 충당했고, 천과 옷을 만들고 공예품을 만들어서 생활의 모든 필수품을 자급자족 했을 뿐만 아니라 남는 것은 판매하기도 했다. 쉐이커 교도들의 손길로 만들어진 물건들은 그 디자인과 내구성과 기능성이 탁월해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쉐이커 교도들의 재림 예수를 자처하는 앤 리 (Ann Lee)의 노동에 대한 훈계가 있다.
- 성령은 더러운 곳에 거하시지 않는다.
(Good spirits will not live where there is dirt.)
- 천년을 살 것 같이 일하고, 내일 죽을 것 같이 일하라.
(Do your work as though you had a thousand years to live and as if you were to die tomorrow.)
- 손은 일에 두고, 마음은 하느님께 두어라.
(Put your hands to work, and your heart to God.)
그녀는 또한 빚을 지지 말도록 훈계했다.
이렇게 잘 나가던 쉐이커교가 19세기에 들어서 급격히 쇠퇴한다. 주요 원인은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농촌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가고, 대량생산 시스템으로 도시의 공장에서 값싼 물자가 생산되면서 품질은 좋지만 비싼 쉐이커 교도들의 수공예품이 인기를 잃게 되고, 고아 입양에 관한 법률이 엄격해 지고 종교기관의 고아 입양을 제한하는 법이 시행되면서 결혼을 하지 않고 고아를 입양해서 키우는 쉐이커교의 공동체 충원 방식이 작동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창 때는 뉴잉글랜드 지방 여기저기에서 공동체가 운영되었지만 지금은 정회원 교인이 단 세 명만 남아서 메인주의 안식일 호수(Sabbathday Lake)라는 마을에서 살고 있고, 그들이 살던 마을은 박물관으로 여기저기 남아서 그들의 검소하고 선량한 신앙생활의 잔상을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종교인들은 그들의 순수한 신앙이 구현된 지고지순한 낙원 공동체를 꿈꾼다. 임자 없는 땅으로 여겨지던 신대륙은 이러한 종교집단이 그들만의 정의롭고 순수한 공동체를 만들어 살기 딱 좋은 곳이었을 게다. 남과 다른 그들의 삶을 핍박할 현실적 권력도 존재하지 않던 곳에서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형성하며 행복하게 살려는 시도가 신대륙 곳곳에서 목격되는 이유다. 최초의 이주자였던 퓨리턴이 그렇고, 퀘이커교, 쉐이커교, 몰몬교 등이 모두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떠나 성실한 노동과 순수한 신앙으로 살아보려는 열정으로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보았지만 인간의 이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오염되고 만다.
평화로운 마을 쉐이커 빌리지를 떠나서 론리 플래닛에 작고 아름다운 동네라고 소개된 피터보러(Peterborough)와 핸콕(Hancock)으로 향했다. 약 한 시간 이상 가야하는 꽤나 먼 거리임에도 지나쳐 가기에는 아쉽다. 막상 찾아가면 너무 작고 인적도 드물어 쓸쓸하기까지 하다. 너무 아름다운 마을을 많이 보고 다녔더니 이제 감동이 적다. 다리도 아프니 차로 교회가 있는 다운타운부터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떠났다. 호수와 둘레에 숲이 있고 다운타운에 교회와 오래된 주막이 있는 것이 전형적인 마을 모습이다.
이제 뉴햄프셔주의 경계를 넘어 뉴잉글랜드의 마지막 주 버몬트주로 간다. 핸콕에서 뉴햄프셔 주도를 이리저리 거쳐서 주간 고속도로 91번을 타고 북서쪽으로 달려 우드스톡에서 하룻밤 둥지를 틀었다. 70마일 1시간 45분 거리다. 비가 점점 거세져서 내일 여정이 걱정되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줄기차게 비가 따라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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