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맨
어린 시절 책에서 언뜻 읽었던 나다니엘 호손의 단편소설 ‘큰바위얼굴’의 현장이 이곳에 있다. 화이트 산악지대 서쪽에 위치한 프란코니아 노치 주립공원 안에 큰바위얼굴이 있다. 그런데 2003년에 산 정상 부근 바위절벽에 붙어있던 눈, 코, 입, 턱이 무너져 떨어져 나가서 이제는 밋밋한 절벽만 남아 있다. 뉴햄프셔주는 1945년에 큰바위얼굴을 주의 엠블렘으로 정했고, 주의 구호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택하겠다 (Live free, or Die)’로 하였다. 주도를 표시하는 도로표지판에도, 자동차 번호판에도 큰바위얼굴이 그려져 있다. 그만큼 중요한 보물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나다니엘 호손이 큰바위 얼굴을 소설로 소개한 뒤 200년 가까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따듯한 감동을 심어주며 건재했던 현장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도 그 바위가 보고 싶었다. 93번 주간고속도로를 따라 프란코니아 노치지역을 향해 북쪽으로 올라가다 ‘배이신(The Basin)’이라는 표지판을 만나 차를 세웠다. 도로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니 높지는 않지만 수량이 꽤 많은 폭포가 대야 모양으로 움푹 파인 거대 바위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이 장관이었다. 직경 9m, 깊이 4.5m의 바위 웅덩이는 약 25.000년 전 빙하기가 끝날 무렵부터 폭포에 패이면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 사람들은 이 대야 바위를 노인(큰바위얼굴)의 발이라고 한다.
다시 93번 고속도로를 타고 더 북진하면서 큰바위얼굴을 찾는데, 도로의 오른쪽으로는 바위산들이 솟아있고 왼쪽으로는 채석장같이 거대한 돌무더기들이 산의 경사면에 걸쳐있었다. 당연히 오른쪽 바위산 중에 하나가 큰바위얼굴일 거라 생각하고 오른쪽만 쳐다보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차를 몰았는데 찾고 보니 예상과 달리 왼쪽 돌무더기 산꼭대기였다. 도로 옆에 올드맨 표지판을 보고 따라 들어갔으나 안내 표지판이 부실해서 찾는데 애를 먹었다. 이곳은 겨울에는 스키장으로, 여름에는 플륨계곡, 에코호수, 프로필호수에서의 수영과 낚시, 보트타기로 유명한 관광지이다. 현장에는 스키 박물관과 큰바위얼굴 박물관이 있고, 캐넌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에어리얼 트램도 운행된다. 그러나 봄은 비수기라서 모두 문을 닫고 있었다.
어린 시절 책을 읽고 가슴에 따뜻하게 남아있던 이야기의 소재가 훼손된 현장을 만나자 가슴이 허전했다. 이 큰바위얼굴을 이 곳 사람들은 올드맨(Old Man)이라고 한다. 산 밑의 프로필호수 위 370m 절벽에 길이 12m 폭 7.6m의 바위가 매달려 있는 모양이 노인의 옆얼굴모습이었다. 얼굴이 무너지기 전에는 저녁 무렵 올드맨의 프로필이 산 밑의 아름다운 호수(프로필 호수)에 비치면 위대한 인물의 얼굴을 만나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위대한 인물이 언젠가 이 마을에 나타날 현인이라고 생각하며 현인이 나타날 날을 고대했다. 이 전설을 1850년에 나다니엘 호손이 단편소설로 만들었고, 전세계의 어린이들이 꿈을 키우며 즐겨 읽는 이야기가 되었다.
붕괴후 후속 대책
큰바위얼굴이 있는 캐넌산은 화강암 바위가 아니고 돌이 결을 따라 떨어져 나가는 바위산이다. 도로에서 보면 캐넌산 중턱에는 산에서 떨어져 내린 돌무더기들이 채석장과 같이 쌓여 있었다. 큰바위얼굴에도 금이 점점 커져서 1920년에 체인으로 묶어 놓았고 1957년에는 20톤의 시멘트와 용접으로 대수선을 했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2003년 5월 3일 한밤중에 얼굴의 돌출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전세계 어린이들의 꿈과 이야기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사실 산의 모양도 바위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렇고 그런 곳인데, 문학을 통한 의미 부여가 이토록 전 세계인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렇다. 세상은 원래 평범하다. 우리는 원래 평범하다. 그 평범에 의미를 붙이면 비범이 된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평범한 나에게, 평범한 가족에게, 평범한 일상에게, 평범한 세상에 의미를 붙여가며 사랑해서 특별한 것을 만드는 작업 과정일 수 있겠다.
돌을 주워다 붙여서 다시 복원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기각되었다. 현재 관계자들이 여러 가지 대안을 마련하고 있고, 앞으로 몇 년에 걸쳐 산 밑에 큰바위얼굴이 비쳐지던 프로필 호숫가에 상징적 디자인 공원이 조성될 예정이다. 2012년 현재는 그 중 제1차 디자인 설치물이 조성되었다. 그것은 철기둥 몇 개를 큰바위얼굴 방향으로 세워 놓고 사람들이 자기 키의 크기에 따라 지정된 곳에 서서 철기둥의 끝과 바위를 일직선으로 바라보면 바위에 얼굴부분이 나타나는 것 같은 효과를 주도록 조형된 것이다. 철기둥의 꼭대기에 얼굴 모양의 작은 돌출물을 붙여놓아서 이 돌출물과 산꼭대기 바위절벽과 보는 사람의 시각을 일치시키면 마치 산 정상에 큰바위얼굴이 보이는 것 같은 효과를 준다. 나머지 3가지 조형물은 앞으로 연차적으로 충분한 토론을 거쳐 설치될 예정이다.
브레튼우즈
문드러진 큰바위얼굴을 뒤로하고 이번에는 브레튼우즈(Bretton Woods)로 향했다. 화이트 산악지대의 서쪽에 있는 프란코니아 노치에서 산을 둘러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갔다. 25마일 30여분의 거리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자 미국의 주도로 전후 세계경제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틀을 짜기 위해서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IMF와 세계은행을 창설하고, 미국의 통화를 기축통화로 정함으로써 오늘날 세계경제의 헤게모니를 미국이 쥐고 흔들게 된 역사적 현장이 바로 이 산골짜기라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브레튼우즈 협정을 수없이 언급하면서도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역사적 현장은 초록의 융단을 깔아놓은 듯 한 프레지덴셜 레인지를 배경으로 새빨간 지붕을 이고 있는 하얀 집으로 웅장하게 서있는 워싱턴호텔이다.
파란 하늘에는 하얀 호텔건물에서 물감이 번져 풀어져 나간 듯 흰 구름이 풍성하다. 거만한 듯 화려하게 서 있는 워싱턴호텔 대형 베란다의 벤치 여기저기에서 커피 한 잔을 들고 앉아서 바로 앞에 자연스런 형태의 골프장이 확 트인 시야를 선물해 주는 가운데 여유롭게 담소하며 그리스식 흰 기둥사이로 먼 산의 파노라마와 흰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여유가 너무 부럽다. 수백만 명의 죽음의 댓가를 치르고 마침내 승리를 눈 앞에 둔 45개 전승국의 국고지기들이 이 한적한 산 속에 모여들어 3주간 골프를 치며 세계경제의 헌법을 만들던 현장이다.
비수기라 이 지역 대부분이 한가한 가운데도 이 호텔만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1902년에 위엄있는 스페인 르네상스 풍으로 지어진 이 호텔은 우아함과 부유함의 첨단이었다. 2600에이커의 대지에 235개의 객실을 갖추고 돈 보따리를 줘야 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식품으로 수 놓았다. 회반죽을 바르는 일에만 250명의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동원되었을 정도다. 그런데 그 영화도 50년 남짓으로 막을 내리고 때때로 파산의 위기에서 간신히 버텨왔다. 화이트 산악지대가 관광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뉴욕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사람들이 휴식을 위해 몰려와서 한 때는 20여개의 대형 호텔들이 이 지역에서 번창했는데 오늘날에는 이 워싱턴 호텔만 남아 있단다. 자동차의 발달이 호텔에서 2주씩 장기간 머물던 손님들에게 변덕스런 기동성을 제공하면서 투숙객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호텔들은 차례차례 문을 닫고 버려졌으며 불타서 무너져 땅으로 돌아갔고 땅은 점차 숲으로 돌아갔다. 세계 대전의 승리를 장식했던 역사적 호텔만 남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가까운 곳에 세계 최초의 톱니바퀴 산악열차라고 자랑하는 워싱턴산 산악열차가 있어 찾아갔더니 비수기라 하루 한번 운행하는데 벌써 올라가 버렸다. 미리 시간을 확인해 놓지 않은 결과다. 할 수 없이 이것으로 워싱턴산 여행을 마감해야 했다. 스키장을 비롯한 모든 종합 레져시설을 빠진 것 없이 고루 갖추고 있는 완벽한 휴양지이지만 나와 같이 갈 길 바쁜 나그네는 그저 눈요기로 만족할 수 밖에 없다. 워싱턴산은 극한적 기후로 유명한데 캐나다와 오대호에서 내려오는 한랭전선이 대서양과 미국 남부에서 불어오는 습기 차고 상대적으로 따스한 온난전선과 중첩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갑작스런 한파에 조난당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매우 많다고 하니 마침 산악열차를 못 탔으니 얼어 죽을 일은 면한 셈이다.
화이트 산악지대를 동남서북으로 한 바퀴 돌았으니 화이트 산악지대의 북쪽에서 동쪽으로 가로 지르는 302번 도로를 통해 다시 콘웨이로 돌아가서 다음 여정인 호수지대로 떠나야 한다. 화이트 산악지대 중 국가 명승지 길(National Scenic Byway)로 지정된 중심부만을 한바퀴 도는데도 오늘 약 250km의 드라이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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