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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ENGLAND

하트포드

뉴욕을 떠나서 대서양 연안을 따라 올라가는 95번 주간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도중에 코네티컷 15번 도로와 66번 도로로 바꿔타고 본격적인 뉴잉글랜드 여행의 첫 기착지인 하트포드에 도착했다. 뉴잉글랜드의 최남단 코네티컷주의 주도로서 뉴욕에서 약 2시간 거리에 있다. 인구 12만여 명의 작은 도시이지만 당당히 코네티컷의 주도로서 웅장한 위엄을 갖추고 있다. 세계적 보험회사의 본사들이 몰려 있어서 ‘세계 보험산업의 수도’라는 별명을 가진 금융 도시의 명성에 어울리게 도심은 깨끗하고 정갈했다. 남북전쟁 후 한 때는 미국에서 가장 부자 도시로 이름을 날렸으나 요즘은 저소득층 주민이 많다고 한다.

일찍부터 퓨리턴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여 약 4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 미술 박물관 웻스월쓰 아쎄니움(Wadsworth Atheneum)이 있고, 가장 오래된 부쉬넬 공원이 있고, 두 번째로 오래된 하트포드 공립 고등학교가 있다.

코네티컷강이 도시를 동서로 나누며 흐르고 있고, 다보탑 모양의 탑을 머리에 인 황금빛 돔을 왕관처럼 쓰고 있는 주청사가 웅장하게 도시의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고, 유서 깊은 역사적 건물과 고층빌딩들이 오보록이 밀집되어 있어 반나절이면 도심을 다 둘러볼 수 있다.

 

마크 트웨인의 집

 

이곳에 뜻밖에 미국 최고의 문호로 손꼽히는 마크 트웨인 하우스가 있다. 남부 미시시피강의 작가로 알고 있던 마크 트웨인의 집을 이곳 북부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만난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그는 원래 미주리주의 미시시피 강변 한니발이라는 동네에서 1835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 곳에서 보냈다. 결혼한 후 버펄로로 이사했다가 1871년에 여기 하트포드로 옮겨와서 누크팜에 살다가 1874년에 이 집을 짓고 1891년까지 살면서‘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등 그의 대표작의 대부분을 이 집에서 집필했다. 당시 하트포드는 유수한 출판사들이 몰려 있었고, 미국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도시였다. 그러나 그가 투자한 인쇄기 사업이 파산하고 빚더미에 앉게 되어 1891년 유럽으로 건너갔다가, 1900년에 다시 코네티컷으로 돌아와 레딩에서 살다가 1910년에 세상을 떴다.

그의 집은 독특한 빅토리아 양식으로 지어진 보랏빛 붉은 색의 3층 건물이었는데 작은 구릉위에 위치하며 주변 자연과 어울려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었다. 단순한 한국 건축물과 달리 집 한칸 한칸을 다양한 도형으로 잇대어 달아낸 듯이 짓는 서양의 건축물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아 나는 바쁘게 사진을 찍어댈 수 밖에 없다. 삼층의 대규모 직사각형 건물의 뒤로 한 쪽에는 육각의 탑을 이어 붙이고, 다른 쪽 벽에는 이층 사각형 건물과 부채꼴 모양의 나지막한 일층 공간을 달아내고, 다시 본 건물 옆면 벽에도 아담한 반원형 일층 유리온실과 삼층 팔각정을 이어 붙여서 건물 내,외부에서 다양한 공간 조형의 유희를 즐기는 건축 양식은 인간의 창의력을 고양시키기에 좋은 방법인 듯 하다. 하나의 건물에 1,2,3층 지붕이 공존하고, 정사각형, 직사각형, 반원형, 부채꼴, 팔각형의 바닥이 공존하고, 박공지붕, 원추형지붕, 팔각지붕 등 다양한 형태의 지붕으로 눈길을 끌어들여서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수십 가지의 파사드를 제공한다. 거기에 볼록 오목 지붕 다락방, 베란다, 창문, 굴뚝 등으로 장식을 추가하여 최대한 호기심을 유발하는 빅토리아식 건축은 어른들의 평생에 걸친 레고 작품이다.

내부에는 그가 좋아한 인도와 일본식의 인테리어를 도입하였고, 매우 정교하게 조각한 목재 가구의 무늬가 특징적이었다. 2층에 있는 그의 서재는 인도 스타일의 벽난로와 섬세한 조각 판넬, 일본식 벽지로 장식한 벽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방이 있었으나, 그는 주로 3층 당구대 옆 책상에서 벽을 향해 앉아 하루 40개피의 담배를 피워가며 글을 썼다고 한다. 담배에 관한 일화로 그가 한 말, “담배 피우기를 끊는 것은 쉬운 일이다. 나는 천 번도 넘게 담배를 끊어보았다.”

고등학교때 영어 선생님이 ‘톰소여의 모험’ 요약본 영어책을 읽도록 하여 매우 힘들어하며 읽은 기억이 있고, 항상 청소년 독서목록 톱 순위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 때문에 마크 트웨인은 나에게도 꽤 익숙한 문학가다. 그런데 나는 어린아이들의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비슷비슷하게 구성한 작품만을 쓴 마크 트웨인을 그저 그런 통속적 작가로 생각해 왔는데, 마크 트웨인은 가장 미국적인 대문호로 추앙 받고 있었다.

마크 트웨인은 새뮤얼 클레멘스(Samuel Clemens, 1835~1910)의 필명이다. “모든 미국 문학은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책 한 권에서 나왔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말은 미국 문학에서 트웨인이 차지한 독보적 위치를 잘 대변한다. 19세기 초 까지 영국 문학의 아류로 미사여구와 감상적 경향이 강하던 미국 문학의 풍토 속에서 트웨인은 힘있고 사실적이며 구어체적인 미국 영어를 사용하며 미국적 목소리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트웨인은 미국에서 나온 첫 번째 대문호로, 뚜렷하게 구별되는 유머러스한 사투리와 사회 인습을 포착해냈다.

미시시피 강가에서 자란 그의 꿈은 증기선 선장이 되어 강을 오르내리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한때 증기선의 항해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12세에 갑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맞은 그는 변변한 공부도 하지 못했으나 인쇄소 식자공으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글을 대하게 된다. 그의 지식은 대부분 이 식자공 시절에 습득한 것이다. 그는 미시시피 강변에서 인생의 많은 경험을 했고, 식자공 시절에 많은 글을 읽게 되었다. 그는 점차 특유의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감각으로 유럽의 문화와 문명을 비평함으로써 미국인들의 자긍심과 자신감을 일깨워주면서 독보적인 미국적 목소리를 만들어 나갔고 독자들의 인기를 끌게 되었다.

“나는 그냥 미국인이 아니라, 전형적인 미국인이다 (I am not an American, I am the American)"이라고 말한 마크 트웨인은 미국인의 원형이다. 그는 인도에 매료되어 우리 앙드레 김 선생마냥 흰 옷을 즐겨 입었고, 그의 흰 머리와 흰 수염이 흰 옷과 잘 어울렸단다. 그는 한 때 사업에서 파산을 하고 세계여행을 하며 호주와 인도, 스리랑카, 모잠비크, 남아프리카를 거쳐 영국까지 간다. 이 여행에서 그는 인도를 비롯한 동양 문화에 깊은 인상을 받은 듯 하다. 그 후 그의 방은 인도, 일본 등의 인테리어가 가미되고 복장까지 인도풍이 된다.

미시시피 강변 한니발에 살던 당시에는 그의 집에 있는 흑인 노예를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지냈으나 장성하여 노예제도의 비도덕성을 점차 깨달으면서 노예제도를 하나님의 뜻과 질서라고 가르치는 기독교를 냉철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노예해방에 반대하는 남부 출신이었으나 제일 먼저 자기 집의 노예를 풀어주었다. 그러나 훗날 하트포드에서 그 흑인이 어려운 생활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그를 고용해서 자기를 돕도록 했고 결국에는 그 가족을 모두 하트포드의 자기 저택 3층 작업실 옆에서 살도록 해서 한 가족 같이 살았으며 그 흑인 부부도 매우 일을 잘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마크 트웨인은 그의 어린 시절 미시시피 강변의 친구들과 이 흑인노예를 소재로 하여 사실적 내용을 소설로 기록했다고 한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1884년에 출간되었으며 미시시피 강가에 있는 마을 세인트 피터스버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알코올 중독자이자 부랑자 아버지를 둔 헉은 괜찮은 집안에 입양되지만 술 취한 아버지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게 된다. 헉은 생명이 위태로움을 느끼고 죽음을 가장한 채 그 집을 떠난다. 그는 어느날 도망 노예 짐을 만난다. 짐은 주인 왓슨이 짐을 더 고된 노예 생활을 해야 하는 남부 한가운데로 팔아버리려 하자 도망을 쳤다. 헉과 짐은 뗏목을 타고 거대한 미시시피 강을 따라 흘러간다. 증기선에 의해 뗏목이 부서지는 바람에 서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도 한다. 그들은 사회의 다양성, 관대함, 때로 잔인하면서 비이성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우스꽝스럽고 위험한 모험을 여러 번 겪는다. 나중에 왓슨이 이미 짐을 해방시켰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헉은 괜찮은 집안에 입양된다. 그러나 헉은 문명화된 사회를 참지 못하고 인디언의 땅으로 도망칠 계획을 세운다. 소설의 마지막은 인간을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는 문명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원시적인 황야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줌으로써, 고전적인 미국 성공 신화의 또 다른 버전을 독자에게 던져주고 있다.

 

이 마크 트웨인의 집은 인쇄기 사업에서 파산한 그가 1891년에 처분한 뒤에 여러 사람들의 손을 전전하면서 훼손되어 갔으며 한때는 빈 집으로 버려지기도 했다. 마크 트웨인의 문학을 사랑하던 하트포드의 유지들이 마침내 돈을 모아 재단을 설립하고 이 집을 인수하여 하나하나 옛 모습을 복원해서 드디어 기념적인 박물관으로 탄생시켰다. 이 마크 트웨인 하우스 겸 박물관은 개별적 관람은 허용되지 않고 매 30분마다 가이드 투어를 통해 설명을 들어가며 약 1시간 가량 돌아볼 수 있게 하였으며, 우리를 안내한 할머니는 내 짐작으로는 거의 80세는 된 듯 한 분이었는데 매우 열정적이고 유머가 있는 분이셨으며, 정확한 발음으로 내가 조금씩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마크 트웨인 하우스는 1962년 국가역사유적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하우스 옆에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방문자 센터에는 마크 트웨인에 대한 자료가 잘 갖추어져 있고, 그에 관한 영화 상영과 세미나실 등을 갖추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스토우 부인의 집과 정원

 

마크 트웨인 하우스 옆에는 넓은 잔디광장을 공유하고 있는 ‘엉클 톰스 캐빈’의 저자 스토우 부인의 집이 있다. 흑인노예의 참혹한 삶을 다루는 소설로 센세이션을 일으켜 링컨의 노예해방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던 이 유명한 여인은 아름다운 정원사이기도 하여 참으로 멋있는 집을 가꾸어 놓았다.

스토우 부인으로만 알고 있는 그녀의 이름은 해리어트 비쳐 스토우(Harriert Beecher Stowe, 1811-1896년)다. 스토우 부인은 1811년 매사추세츠주 리치필드(Litchfield)에서 목사인 아버지의 열 한 자녀중의 여섯째로 태어났다. 1832년 신학대학의 총장인 된 아버지를 따라 오하오주의 신시내티로 이사하고 거기서 신학대학 교수인 남편과 만나 결혼을 했다. 1850년에 남편이 매사추세츠주 브룬스윅의 보도인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1853년까지 브룬스윅에서 살았으며, 이때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발표했다. 그 후 남편이 앤도버로 학교를 옮기자 거기서 1864년까지 살았다. 남편이 은퇴하자 부부는 하트포드로 이사해서 꿈의 집을 지었지만 다시 팔고 1873년에 바로 이곳 포레스트 스트리트에 빅토리아 고딕 양식의 예쁜 집을 짓고 죽을 때 까지 23년간 살았다.

스토우 부인은 유명한 작가요 사회개혁가일 뿐만 아니라 화가요 정원사로서도 걸출한 인물이다. 새봄을 맞아 여러 꽃과 나무가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정원이 빅토리아 고딕 양식의 앙큼맞은 집과 어울려서 계속 카메라의 셔터를 유혹했다. 19세기 뉴잉글랜드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 정원 가꾸기는 모든 가정의 주요 관심사였다. 정원은 집주인의 고상한 정신과 품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가풍이며, 아이들은 정원 가꾸기를 통하여 에티켓과 노동 윤리와 근로정신을 교육받았으며, 잘 가꾼 정원은 최고의 자랑거리였다. 스토우 부인이 직접 심은 것으로 보이는 백년이 넘은 산딸나무와 목련이 아름다운 고옥을 둘러싸며 터널을 이루고 있다. 철마다 새로운 꽃을 심는 둥근 정원, 키친 허브 정원, 독특한 블루 가든, ‘정글’이라고 부르던 야생화 정원, 고상하고 이국적인 식물로 장식하는 하이 빅토리아 가든, 스토우 장미 정원등이 집을 감싸 안으며 둘러 있는 풍경에 매혹되어 나는 계속 집을 뱅뱅 돌며 감탄사를 토해내기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