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자유로운 신앙을 추구한 로드아일랜드 (Rhode Island)
뉴잉글랜드 정착지 개척과정은 마치 개신교의 분파 과정과 같다. 퓨리턴 식민지들의 맏형인 매사추세츠는 교회를 통해서 퓨리턴 신앙의 정통성을 고수하고 현실 사회에서 퓨리턴적 이상을 삶 속에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때때로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여러 신자들의 신앙양심에 관대하지 못하고 배척하기도 했고, 소위 ‘퓨리턴적인 것’의 지나친 형식성에 집착하여 조직의 권위에만 의존하는 위선적 권위주의적 조직체로 비치기도 했다. 여기에 불만을 품고 저항하다가 추방된 사람들과 탄압을 못이겨 새로운 안식처를 찾아 나선 사람들과 퓨리턴 신앙의 순결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몇몇 지도자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착지를 개척하며 새로운 식민지를 형성해 나갔다. 코네티컷, 뉴헤이븐, 로드아일랜드는 이런 사정에서 개척되었으며, 점차 매사추세츠 맏형과 경쟁하는 세력으로 발전해 나갔다.
매사추세츠에서 추방된 로저 윌리엄즈를 중심으로 하나 둘씩 모여 든 사람들이 새로 정착하기 시작한 로드아일랜드에는 매우 개성적이고 고집스러운 신앙성향과 사회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매사추세츠의 강압적이고 집단주의적인 통치에 반발하여 떠나온 로드아일랜드 정착민들은 무엇에도 매이기 싫어하여 공동의 신앙고백이나 신조, 공동의 교회체제, 공동의 신앙생활 양식, 법에 따라 강요되는 공동의 종교의식 같은 것은 아예 만들지 않았다. 그들은 틀에 박힌 종교적 질서를 원천적으로 배격했다. 그들의 신앙적 삶의 기본단위는 신앙양심을 지키는 개인과 그 개인들로 구성된 가정이다. 심지어 종교적 극단주의자, 자유사상가, 무정부주의자등의 과격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로드아일랜드 식민지의 모체가 되는 정착지로는 프로비던스(Providence)가 가장 먼저 생겼고, 뒤를 이어 포츠머쓰(Portsmouth), 뉴포트(Newport), 워윅(Warwick)이 들어섰다. 토지는 원주민 부족들과 개별접촉을 통하여 그때그때 아무 곳에나 매입할 뿐이었다.
나라간셋트(Narragansett)만 북쪽에 위치한 프로비던스는 매사추세츠에서 추방된 윌리엄즈가 플리머쓰 식민지에서의 새 삶을 거절당하고 세일럼(Salem)을 거친 뒤에 원주민들의 토지를 구입하여 1936년에 건설한 정착촌으로서, 윌리엄즈는 이것을 고통과 박해 속에서도 자신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역사라고 생각해서 ‘신의 섭리’(Providence)라고 명명했다.
2년 뒤에는 역시 매사추세츠에서 추방당한 허친슨과 그 추종자들이 나라간셋트만 입구에 위치한 아퀴드넥(Aquidneck)섬(나중에 Rhode섬이 된다)에 정착하면서 포츠머쓰가 시작된다.
보스턴에서 상업에 종사하다 신앙문제로 마찰을 빚던 코딩턴은 부와 지식, 정치적 감각과 경제적 능력을 고루 갖춘 사람으로서, 초기 포츠머쓰에 합류하였다가 신앙노선 등이 맞지 않자 이듬해(1639년) 다시 새 정착지 건설에 착수하는데, 이것이 같은 섬 남단에 위치한 뉴포트 정착촌이다. 뉴포트는 나라간셋트만과 대서양이 맞닿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처음부터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발달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고, 활발한 경제활동과 진취적 전향적 분위기로 인해 그 후 로드아일랜드의 대명사가 되었다. 막강한 재력을 가지고 이곳을 개인소유의 대영지로 만들려던 코딩턴의 꿈은 결국 좌절되었고, 그는 퀘이커 교도로 개종했고, 그 영향을 받아 뉴포트는 1670년 이후 로드아일랜드에서 퀘이커 교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광대한 나라간셋트만을 가운데 두고 주변 사방에 정착촌들이 흩어져 있어서 그들 사이의 연결이 쉽지 않은데다가, 나름대로의 신념과 고집에 사로잡힌 이상주의자들이어서,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영위해나갔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워 국왕의 특허장도 받지 않고 설립된 이 정착촌들을 흡수하려는 매사추세츠의 위협이 노골화해 가자, 고립과 독립성에 만족해 오던 이곳 정착지들도 문제의 심각성을 자각하고 뭉치기 시작했다. 이 위협을 가장 민감하게 느낀 프로비던스가 통합의 주도적 역할을 하며 마침내 윌리엄즈가 1644년에 크롬웰 영국정부로부터 특허장을 발급받으며 독자적인 식민지의 기초를 닦아나갔다. 드디어 1647년 네 정착지의 대표들이 모여 로드아일랜드의 헌법을 통과시켰다. 이 헌법은 통합 정부와 개별 정착지 사이의 권력분산을 명시하고, 공무원의 임기를 짧게하여 공직의 기회가 많은 사람에게 돌아가게 하고, 모든 주요 사안을 주민 투표에 따라 결정하도록 해서 다른 식민지에서 보다 투표나 선거가 훨씬 빈번했다.
로드아일랜드는 상업 중심지 뉴포트를 중심으로 한 활발한 교역 활동에 힘입어 경제적 번영과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으나, 초창기의 드높은 이상은 점점 멀어져 갔고 심지어 노예무역까지 성행하며 세속화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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