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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잉글랜드 부록

뉴잉글랜드 형성기의 역사 - 식민지의 맏형 메사추세츠만 식민지

식민지의 맏형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17세기 초 아메리카 대륙에는 유럽의 절대군주들과 재력가들의 후원을 받는 수많은 식민지와 교역거점들의 건설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절대군주에게는 식민지 확보 및 확대가 국가 발전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고, 상업자본가들에게는 가장 확실한 축재수단이었다.

 

뉴잉글랜드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거룩한 신앙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청교도들의 종교적 동기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상업자본가들의 경제적 동기가 합력해서 건설된 독특한 식민지다. 당시에 뉴잉글랜드에 진출하려면 영국 국왕의 특허장(patent)을 받아야 했으며, 상업자본가들이 국왕의 특허장을 받아 식민지 정착을 원하는 사람들을 모집하고 관할지역에 정착할 수 있는 권한과 자금을 대여하고 식민지 정착민들로부터 추후에 물품으로 돌려받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1629년 찰스1세가 의회를 해산함에 따라 의회에 기반을 두고 있던 청교도들의 정치적 입지가 위축되기 시작했고, 라우드 대주교를 중심으로 국교회의 청교도에 대한 탄압이 날로 증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유럽대륙의 30년전쟁으로 대외무역이 위축되면서 이 분야에서 활동이 컸던 청교도들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윈쓰럽(John Winthrop)은 독실한 신앙심으로 많은 시간과 물질을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일에 바쳤으며, 개인의 신앙이 사회에 대한 책임으로까지 승화돼야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유한 양반집 아들로 태어나 커다란 영지를 물려받았으며, 캠브릿지대학에서 공부하고 각종 공직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청교도에 대한 국교회의 탄압이 증가하면서 신앙을 위하여 고난을 감수해야 할 준비를 해야 했고, 이 어려움을 벗어날 피난처를 마련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마침 그는 매사추세츠만 식민회사가 국왕의 특허장을 받아 신대륙 뉴잉글랜드의 찰스강과 매리맥강 사이의 정착지에 식민지를 개설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서 영국을 떠나 신앙의 보금자리를 개척하기로 결단하고 퓨리턴 지도자들과의 협의를 통하여 뉴잉글랜드 이주에 관한 캠브릿지합의서를 만들었다.

 

매사추세츠만 식민회사는 주주총회를 열어 윈쓰럽을 메사추세츠 초대지사로 선출했고, 윈쓰럽은 동료 청교도들을 설득해서 종교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영국을 떠나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는 퓨리턴 국가, 퓨리턴 교회의 설립을 위하여 신앙의 동지들이 뉴잉글랜드로 함께 떠나자고 독려했다. 마침내 1630년 4월 8일 영국 사우스앰프턴 항에서 4척의 배가 매사추세츠로 떠났고, 한 달 후 다시 7척의 배가 떠나 매사추세츠 퓨리턴 식민지의 역사적 막이 올랐다. 1630년 한 해 동안 약 2,000명이 매사추세츠에 새 터전을 잡았고, 그 후 10여년에 걸쳐 매사추세츠의 인구는 약 2만명으로 늘어났다.

 

윈쓰럽은 매사추세츠 식민지를 사랑의 끈으로 묶여진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묘사하면서, 이 공동체 안에서는 모든 구성원들이 기쁨과 슬픔, 노동과 고통을 함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경건한 사회를 건설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신분에 따른 빈부의 격차는 당연한 것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통념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신분과 재산권 제도는 하나님이 정해 준 질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약탈하는 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복종을 거부하는 빈자도 하나님이 정해 준 질서를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자는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기회를 가지며, 또 선량한 빈자는 믿음과 인내와 순종의 삶을 실천하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1630년 6월에 도착한 신대륙은 세일럼(Salem)근처였다. 그러나 이곳은 이들의 꿈을 펼치기에는 너무 협소했다. 답사팀이 매사추세츠만 일대를 샅샅이 훑으며 지리를 익혀나갔지만 적당한 정착지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논쟁만 계속되고 있는 사이에 극도의 피로와 열악한 거주환경으로 이주자들이 질병에 걸리고 마침내 쓰러지기까지 했다. 설상가상 북쪽 해안지대에 프랑스인들의 습격 소문까지 돌자 지도자들은 한 곳에 모여 정착하려던 당초의 방침을 바꾸어 당분간 분산 거주하기로 했다. 그리해서 각각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워터타운, 록스베리, 돌체스터, 메드포드, 사우거스, 샤우무트, 찰스타운 등 일곱 개의 정착촌이 생겨났다.

 

이 중에서 샤우무트는 나중에 영국에 있는 도시 이름을 따서 보스턴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매사추세츠의 중심지가 되었다. 처음에는 보스턴은 지형이 협소하여 대규모 정착지로는 부적합하고, 바다 쪽으로 너무 돌출해 있어서 해상으로부터의 공격에 취약하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보니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여러 정착촌들을 연결해 주는 교량 역할을 할 수 있고, 미스틱강과 찰스강이 함께 매사추세츠만으로 유입되는 지형적 여건 덕분에 해안지방과 내륙지방 사이의 교역에서도 연결고리 역할을 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다. 항구가 개설되자 외부세계와 연결되는 통로가 되었으며, 무엇보다 마실 물이 풍부했고,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비옥한 토지도 넉넉했다. 보스턴은 반도 형태의 지대로서 세 개의 작은 구릉으로 형성돼 있어서 처음에는 편의상 세 개의 언덕을 뜻하는 ‘Tramount' 또는 'Trimountain'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나중엔 ’비콘 언덕(Beacon Hill)‘으로 불렸다.

 

한 번 분산되어 정착하자 다시 한 곳에 모여 견고한 성곽도시를 건설한다는 원칙을 실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 동안 힘들여 일궈온 정착작업을 중단하고 옮기는 것을 이주민들이 꺼렸기 때문이다. 정착지들이 분산되는 것은 퓨리턴 지도자들의 처음 이상과 어긋난 것일 뿐만 아니라 식민지의 사회질서 유지에도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할 수 없이 매사추세츠 식민회사는 사회질서 유지에 필요한 각종 법률과 규정을 제정해서 각 공동체에 적용시키고, 여러 가지 제도와 기구를 도입했다.

 

이상적 신앙 공동체를 꿈꾸며 이주해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회체제도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영국에서처럼 주교가 여러 개별 교회를 관장해서 지휘하거나 특정 계급이 성직 임명권을 하향식으로 행사하는 중앙집중식 질서는 청교도들이 원하는 체제가 아니었다. 이들은 교회 체제와 신앙 생활 규범 및 일상생활 규칙을 신자들 상호간의 계약으로 규정해 가는 회중교회 제도가 식민지 생활에서 혼란을 줄이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회중교회에서는 교회를 조직하고 통솔하는 일과 성직자, 교사, 장로, 집사 등 제 직분자를 선출하고 임명하는 일은 오직 교회 구성원 즉 ‘회중’의 권한에 속하며, 이 권위는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교훈과 관행에 근거를 두는 것이라고 믿었다. 마침내 찰스타운과 워터타운에 회중교회가 조직되었고, 찰스타운교회는 얼마 되지 않아 보스턴으로 옮겨져 보스턴제일교회가 된다.

 

이와 같이 윈쓰럽 지사가 이끄는 식민지 정부가 이상적 신앙 공동체를 지향했기 때문에 식민지 정부와 교회 사이에는 당연히 일체감이 형성되어 상호 협조 하에 행정체제가 이뤄졌다. 식민지 정부는 자유인 신분자들에게만 재산소유권을 인정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또 재산소유권자만 행정에 참여할 수 있고 교회 정회원이 될 수 있도록 했다. 결국 교회 정회원에게만 토지가 분양되었고, 이로써 교회는 신앙 공동체 뿐만 아니라 세속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고, 자유인 신분이 아닌 이주민들은 자유인 신분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자유인 신분을 획득하려면 교회의 정회원이 되어야 한다. 교인은 크게 정회원과 일반교인으로 구성되는데, 일반교인이 정회원이 되려면 충분한 신앙적, 도덕적 자질을 함양하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증명하도록 했다. 매사추세츠에서 교회 정회원이 된다는 것은 성공적인 삶을 보장하는 하나의 첩경이 되었다.

 

몇 년 뒤인 1636년에 식민지 정부는 뉴타운(지금의 보스턴 캠브릿지)에 대학을 세우기로 하고 400파운드의 기금을 조성했으며, 1639에는 하버드(John Harvard)목사가 상당액의 재산을 학교에 기증해서 학교 이름도 하버드 대학으로 바꿨다. 하버드 대학은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요청에 따라 설립되었다. 좁은 의미의 신학대학은 아니었지만 신앙을 부차적인 가치로 생각하는 평범한 교육기관도 아니었다. 당시 청교도들이 지향하던 시대적 요청과 신앙적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데 필요한 유능한 인재의 배출이 설립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공동체에서는 영국에서의 양반층(gentry)이 상류계층을 형성했고, 그 아래 일반주민들은 종속적인 하부계층을 형성했다. 상류계층은 영국에 있을 때부터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던 사람들로서 뉴잉글랜드에 와서도 여전히 사회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이 상류계층은 영국에서 익숙하게 경험해 온 존경과 복종에 기초를 둔 이른바 ‘서열사회’를 그대로 뉴잉글랜드에 이식하려 했고, 일반주민들도 영국에 있을 때부터 이런 사회질서에 익숙해져 있었다. 덕분에 윈쓰럽을 비롯한 상류층 인사들은 일반 주민들의 큰 저항 없이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토지 분배에는 시각차가 컸다. 일반 서민들은 모든 토지가 평등하게 고루 분양돼야 한다는 것이고, 상류층은 식민지의 발전을 위해서 토지 사용의 효율성을 높여야 하므로 투자 능력에 따라서 토지를 차등 배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결국 힘이 약한 서민들의 일방적 패배로 끝이 나고, 결국 새 토지법에 따라 보스턴 상류층은 1인당 평균 약 200에이커의 땅을 분양받았고 많이 받은 사람은 700에이커까지 받았지만, 일반 서민들에게 돌아 온 땅은 모두 합해도 1,500에이커 안팎으로, 1인당 평균 30에이커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고 심지어 겨우 8에이커를 분양받은 경우도 있었다. 그마저도 용인 신분에게는 토지분양이 제외되었다.

 

이후 계속적인 이민자들의 증가로 1640년 보스턴의 인구는 약 2만명으로 증가했고, 이에 따라 새로운 토지조성 활동이 활발히 시행되었으며 새로운 정착촌도 계속 만들어져 나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보스턴의 사정은 점점 지도자들의 꿈을 외면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사회적 동질성이 점차 약화되고 직업과 종교관등의 다양성이 증대되었고 경제적 이익추구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보스턴은 항구로서의 유리한 입지조건 등으로 식민지의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지만, 불행히도 청교도의 꿈을 가로막는 갖가지 역기능의 진원지가 돼가고 있었다. 보스턴은 계속 밀려드는 이주민들이 뉴잉글랜드에 첫발을 딛는 곳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상업, 무역의 번영을 누렸다. 이주자들의 체류비 수입 뿐만 아니라 모피, 목재, 농어축산물의 교역 중심지로 발전해 나갔으며, 식민지 정부의 행정, 사법, 입법의 중심지가 되었다. 보스턴은 이제 세속적 부의 축적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각하는 물신주의가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로부터 매사추세츠 식민지는 하나님의 도성을 건설하려는 꿈이 점차 희석되면서 정치, 경제적 번영의 길로 방향을 틀며 달려갔다.

 

1649년 매사추세츠 퓨리턴 식민지를 기획하고 지도해왔던 초대 지사 윈쓰럽이 사망했다. 신앙의 자유를 위한 목숨을 건 모험을 통하여 그는 가장 신앙적인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일생 동안 애썼다. 하지만 그가 세우고 이끌어왔던 사회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과 악마적 죄악이 서로 뒤섞여 있는 사회, 사랑의 공동체와 기독교적 가치의 구현을 위한 노력이 폭력과 투옥, 추방과 형벌 등 온갖 씁쓰레한 부산물들로 얼룩진 사회로 변질되고 있었다.

 

매사추세츠 식민지는 영국 본국으로부터의 간섭과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자치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함으로써 어느 정도 퓨리턴 자치 식민지의 기초를 갖추기는 했다. 인근에 위치한 코네티컷, 뉴헤이븐, 플리머쓰 등 소규모 식민지와 연합하여 뉴잉글랜드 동맹을 형성하고 맹주의 역할도 수행했다. 그러나 명예혁명 후 영국은 제국정책의 일환으로 해외의 모든 식민지를 간섭하기 시작했고, 1691년에는 매사추세츠의 법적 지위를 국왕의 직속 식민지로 바꾸는 새 칙허장이 발급되면서 더 이상 퓨리턴 자치 식민지가 아닌 하나의 평범한 국왕 직속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청교도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켜서, 당시 청교도 가정은 아이를 평균 17명쯤 낳았다. 데이비드 헤켓 피셔는 이렇게 쓰고 있다. “대이주기에 매사추세츠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미국 양키들의 종축 역할을 했다. 그들의 번식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200년 동안 한 세대 마다 인구가 두 배씩 증가할 정도였다. 1700년 무렵에는 인구가 10만 명, 1800년 무렵에는 100만 명으로 증가했다. 1630년부터 1640년 사이에 매사추세츠로 건너온 영국인 정착민 2만1천 명의 후손이 그렇게 늘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