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의 ‘정신적 지주’



2001년 6월27일 김수환 추기경이 팔순잔치에서 주교들과 함께 촛불을 끄고 있다. < 연합뉴스 >

1969년 5월19일 동양인 최초로 추기경이 된 김수환 추기경이 귀국해 모자를 흔드는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


1969년 4월28일 추기경으로 임명된 김수환 대주교 서임식
< 경향신문 자료사진 >

16일 선종한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자신의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2004)에서 엄혹했던 군부독재 시절을 이렇게 돌아봤다. 68년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돼 30년간 재직하면서 국민의 자유와 인권 보장, 민주화에 헌신한 그는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천주교 신자뿐 아니라 한국인 모두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가톨릭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에 임명된 그는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도 한국 가톨릭의 기틀을 다지고 위상을 높였다. 그는 해외 선교 지원, 북한 동포 돕기 운동과 남북한 교회 교류 활동에도 앞장섰다.
김 추기경은 98년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난 뒤 서울 종로구 혜화동 주교관 내 추기경 집무실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오래 사는 것’보다 ‘기쁘게 잘 사는 것’이 더 소중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교회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또다른 삶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조부 김보현(요한)이 1868년 무진박해 때 감옥에서 순교해 유복자로 태어난 김 추기경의 부친은 옹기장수로 영남 일대를 전전하면서 궁핍한 살림을 꾸렸다. 순교자의 후손답게 깊은 신앙심을 가졌던 김수환은 모친의 권유에 따라 형 동환과 함께 성직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김수환은 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 성직자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41년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선발돼 일본 도쿄(東京) 유학길에 올랐지만, 당시 김수환은 성직의 길보다 항일독립투쟁에 더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앞서 동성상업학교 졸업반 시절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시험문제가 나오자 “황국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고 썼다가 교장에게 불려가 뺨을 맞기도 했다.
그는 한국전쟁이 벌어지던 51년 사제 서품을 받으면서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장)라는 성구를 선택했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김수환 신부는 66년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주교품을 받았다. 김수환 주교가 택한 사목 표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였다.
그는 69년에 추기경으로 서임되는데, 당시 47세로 전 세계 추기경 136명 가운데 최연소자였다. 김 추기경은 “추기경 임명 통보를 받는 순간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인정 받았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다”고 회고한 바 있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서 김 추기경은 한국 교회의 위상을 높이는 데 앞장섰다. 81년 테레사 수녀의 첫 방한을 성사시켰고, 조선교구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처음으로 방한했던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84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89년) 등 굵직한 행사들이 그의 지휘 아래 치러졌다. 김 추기경이 교구장을 맡은 30년간 서울대교구는 48개 본당, 신자 14만여명에서 197개 본당, 신자 121만여명으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말했던 그는 70년대 이후 가난하면서도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해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과 서민, 노동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다. 김 추기경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천주교회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다가 87년 ‘도시 빈민 사목위원회’를 교구 자문 기구로 설립했다.
그는 억압받고 가난한 민중들에 대한 관심에 그치지 않고 파행적인 정치 현실에 대한 강경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김 추기경은 71년 성탄 자정미사 강론에서 장기집권으로 치닫는 박정희 정권의 공포정치를 비판했고 이듬해 8월에는 시국성명을 발표, 박 정권과 충돌했다. 이후로도 지학순 주교의 구속(74년)을 시작으로 명동 3·1절 기도회(76년), 전주교구 7·18 기도회(78년) 등으로 사제들이 잇따라 구속되자 김 추기경은 성명서와 강론을 통해 자유언론과 인권, 민주회복을 강조했다.
김 추기경의 정치 참여는 당연히 가톨릭과 정권의 대립 양상을 낳았고, 교회 내부에 교회의 정치 개입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명동성당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해방구로 자리매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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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김옥균 주교 금경축 감사 미사 도중 어린이의 입맞춤을 받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중에서 |
이처럼 한국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정권을 향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그였지만 엄숙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김 추기경은 2003년 서울대 초청 강연에서 “삶이 뭔가, 너무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기차를 탔다 이겁니다. 기차를 타고 한참 가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이라고 하는 거죠”라고 말해 좌중을 웃겼다. KBS <열린음악회>에 출연해 ‘애모’를 열창하는가 하면, 코미디언 이경규씨와 만났을 때 “추기경님 정말 인중이 긴 것 보니 오래 사시겠다”는 농담을 듣고도 인자한 웃음을 보였다.
민주화의 중요 고비마다 물꼬를 트는 발언으로 ‘정의의 사도’로 존경받았던 김 추기경은 그러나 2000년대 이후 현실정치 무대의 보수파와 뜻을 같이 하는 발언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우려 섞인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김 추기경은 인권침해의 대명사인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시기상조란 의사를 밝혔다. 2004년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다. 2005년 사학법 정국에서도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는 한나라당을 두둔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정국 때는 촛불시위 자제를 촉구했다.
이를 두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고문인 함세웅 신부가 “김 추기경이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직격탄을 날리는 등 교계 내에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고인의 삶과 신앙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약간씩 이견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한국 사회에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를 철저히 실천해온 신앙인이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김석종 선임기자 sjkim@kyunghyang.com>
평생을 약한 자의 편에서… 사회의 어둠 밝힌 빛으로
[김수환 추기경 선종] 민주와 정의 지켜온 수호자의 삶
"교회가 사회 외면하면 안돼" 독재에 저항… 70, 80년대 명동성당 민주화 성역 이끌어
"교회가 사회 외면하면 안돼" 독재에 저항… 70, 80년대 명동성당 민주화 성역 이끌어
"교회가 사회현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추기경으로 서임된 이듬해인 1970년 김수환 추기경은 성탄메시지에서 종교계의 사회참여를 촉구했다. 40대 젊은 추기경의 이 메시지는 이후 독재정권의 탄압에 꺾이지 않고 시대를 향한 발언을 마다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 신호탄이었다. 추기경의 성탄 메시지는 이후 안팎으로 언로가 봉쇄된 독재정권하에서 민주화를 갈망하는 국민들에게 한줄기 단비와 같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개헌을 준비하던 1971년, 김수환 추기경은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성탄미사에서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이런 법을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를 시청하던 박 대통령은 방송국에 방송중지 명령까지 내렸지만 방송은 전파를 탔고, 이후 김수환 추기경과 카톨릭계에 대한 정권의 감시와 압박은 노골화됐다. 유신이 단행되고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는 등 시국이 어수선했던 1974년 성탄절에는"정치와 언론의 자유가 침해된 곳에 종교 자유만이 따로이 건재할 수 없다"며 종교의 사회 참여 필요성을 재천명하기도 했다.
정권의 강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의 잇단 민주화 발언은, 정치를 좋아하는 젊은 추기경이 젊은 신부들을 부추겨 데모를 한다며 교회의 정치참여를 비난하는 한편으로, 다른 한쪽에서는 교회가 미온적 태도를 버리고 더 과감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교계 내부의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일부 신도로부터 교황청에 고발당하기도 했지만 추기경은 솔직한 메시지로 신도와 국민들을 감동시켰다.
이른바 '3ㆍ1 명동사건'으로 김대중씨와 문익환씨, 함세웅 신부가 구속된 1975년 3월 시국기도회에서 그는 "의견이 다르다고 사람들을 단죄하고 하느님의 엄한 심판을 자초하는 우를 범하지 마십시오"라고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유신정권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하에서도 민주화를 향한 그의 행보는 중단되지 않았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절정에 달했던 1987년 6월 항쟁 당시의 일화. 시위대가 경찰의 진압에 몰리자 뿔뿔이 흩어져 명동성당에 재집결했다.
당시 치안본부장과 안기부 차장은 이튿날 밤 김 추기경을 찾아와 "시위대를 모두 내보내지 않으면 공권력을 투입해 강제 해산하겠다"고 위협했으나 김 추기경은 "공권력을 투입하려면 나를 밟고 지나가라"며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1990년 4월에는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 항소심 공판에서 법정에 직접 나가 증언하기도 했으며, 1996년 7월에는 박노해 시인 석방 탄원서를 대통령에게 보내는 등 종교계의 수장을 넘어서 민주화의 횃불을 들었다.
노동자, 농민 등 인권 유린을 당하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김 추기경의 애정도 각별했다. 1978년 사측에 의해 여공들이 인분(人糞) 세례를 받은 '동일방직 노조탄압사건' 이 발생하자 그는 기도회에서 "왜 이렇게까지 사람이 사람을 짓밟고 울려야 합니까? 이 나라 법은 약한 자들을 벌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까? 힘없는 이들을 계속 짓밟으면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습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신정권의 막바지에 달했던 1979년 여름. 당국이 나눠준 불량감자씨앗으로 피해를 본 뒤 당국으로부터 피해보상을 받아냄으로써 전국적인 피해보상운동을 이끌어낸 경북 영양의 농민 신자 오원춘씨가 정보기관원에 의해 납치된 이른바 '오원춘 사건'. 진상 규명을 촉구하던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자 그는 안동본당에서 열린 시국기독회에 참석해 스피커 볼륨을 최대한 높여 정부의 농민운동 탄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드러눕는 곳에, 김수환 추기경은 그곳에서 온갖 바람을 온몸으로 막으며 늘 함께 있었다.
추기경으로 서임된 이듬해인 1970년 김수환 추기경은 성탄메시지에서 종교계의 사회참여를 촉구했다. 40대 젊은 추기경의 이 메시지는 이후 독재정권의 탄압에 꺾이지 않고 시대를 향한 발언을 마다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 신호탄이었다. 추기경의 성탄 메시지는 이후 안팎으로 언로가 봉쇄된 독재정권하에서 민주화를 갈망하는 국민들에게 한줄기 단비와 같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개헌을 준비하던 1971년, 김수환 추기경은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성탄미사에서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이런 법을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를 시청하던 박 대통령은 방송국에 방송중지 명령까지 내렸지만 방송은 전파를 탔고, 이후 김수환 추기경과 카톨릭계에 대한 정권의 감시와 압박은 노골화됐다. 유신이 단행되고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는 등 시국이 어수선했던 1974년 성탄절에는"정치와 언론의 자유가 침해된 곳에 종교 자유만이 따로이 건재할 수 없다"며 종교의 사회 참여 필요성을 재천명하기도 했다.
정권의 강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의 잇단 민주화 발언은, 정치를 좋아하는 젊은 추기경이 젊은 신부들을 부추겨 데모를 한다며 교회의 정치참여를 비난하는 한편으로, 다른 한쪽에서는 교회가 미온적 태도를 버리고 더 과감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교계 내부의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일부 신도로부터 교황청에 고발당하기도 했지만 추기경은 솔직한 메시지로 신도와 국민들을 감동시켰다.
이른바 '3ㆍ1 명동사건'으로 김대중씨와 문익환씨, 함세웅 신부가 구속된 1975년 3월 시국기도회에서 그는 "의견이 다르다고 사람들을 단죄하고 하느님의 엄한 심판을 자초하는 우를 범하지 마십시오"라고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유신정권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다.
당시 치안본부장과 안기부 차장은 이튿날 밤 김 추기경을 찾아와 "시위대를 모두 내보내지 않으면 공권력을 투입해 강제 해산하겠다"고 위협했으나 김 추기경은 "공권력을 투입하려면 나를 밟고 지나가라"며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1990년 4월에는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 항소심 공판에서 법정에 직접 나가 증언하기도 했으며, 1996년 7월에는 박노해 시인 석방 탄원서를 대통령에게 보내는 등 종교계의 수장을 넘어서 민주화의 횃불을 들었다.
노동자, 농민 등 인권 유린을 당하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김 추기경의 애정도 각별했다. 1978년 사측에 의해 여공들이 인분(人糞) 세례를 받은 '동일방직 노조탄압사건' 이 발생하자 그는 기도회에서 "왜 이렇게까지 사람이 사람을 짓밟고 울려야 합니까? 이 나라 법은 약한 자들을 벌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까? 힘없는 이들을 계속 짓밟으면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습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신정권의 막바지에 달했던 1979년 여름. 당국이 나눠준 불량감자씨앗으로 피해를 본 뒤 당국으로부터 피해보상을 받아냄으로써 전국적인 피해보상운동을 이끌어낸 경북 영양의 농민 신자 오원춘씨가 정보기관원에 의해 납치된 이른바 '오원춘 사건'. 진상 규명을 촉구하던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자 그는 안동본당에서 열린 시국기독회에 참석해 스피커 볼륨을 최대한 높여 정부의 농민운동 탄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드러눕는 곳에, 김수환 추기경은 그곳에서 온갖 바람을 온몸으로 막으며 늘 함께 있었다.
김추기경 어록

김수환 추기경은 1980년대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정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며 우리 사회의 길잡이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시종일관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으며 인간적인 모습으로 신자들과 국민을 이끌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입니다’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위정자도 국민도 여당도 야당도 부모도 교사도 종교인도 모두 이 한 젊은이의 참혹한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반성해야 합니다.”(1987년 1월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발생 뒤 명동성당에서 열린 ‘박종철군 추모 및 고문 추방을 위한 미사’ 중)
“교회의 입장은 될 수 있는 대로 남북관계가 정말 호전되고, 이래서 정말 정부도…이산가족도 서로 만나게 되고 남북 교류도 있고, 이래서 점진적으로 우리가 남북이 좀 평화롭게 통일을 향해서 뭔가 노력하는 그런 것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소망이죠.”(1987년 7월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과 관련한 기자회견)
“사형은 용서가 없는 것이죠. 용서는 바로 사랑이기도 합니다. 여의도 질주범으로 인해 사랑하는 손자를 잃은 할머니가 그 범인을 용서한다는데 왜 나라에서는 그런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까?”(평화신문 1993년 새해 특별대담 중 사형 폐지를 주장하며)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무슨 보복이나 원수를 갚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 바로세우기를 위해섭니다. 책임자는 분명히 나타나야 하고, 법에 의해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평화신문 1996년 신년대담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삶이 뭔가, 삶이 뭔가 생각하다가 너무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기차를 탔다 이겁니다. 기차를 타고 한참 가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이라고 하는 거죠.”(2003년 11월 서울대 초청강연 중)
“내가 제일 바보 같다.”(2007년 10월 모교인 동성중·고 100주년 기념전에서 동그란 얼굴에 눈, 코, 입을 그리고 밑에 ‘바보야’라고 적은 자화상을 선보이며)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입니다’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위정자도 국민도 여당도 야당도 부모도 교사도 종교인도 모두 이 한 젊은이의 참혹한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반성해야 합니다.”(1987년 1월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발생 뒤 명동성당에서 열린 ‘박종철군 추모 및 고문 추방을 위한 미사’ 중)
“교회의 입장은 될 수 있는 대로 남북관계가 정말 호전되고, 이래서 정말 정부도…이산가족도 서로 만나게 되고 남북 교류도 있고, 이래서 점진적으로 우리가 남북이 좀 평화롭게 통일을 향해서 뭔가 노력하는 그런 것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소망이죠.”(1987년 7월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과 관련한 기자회견)
“사형은 용서가 없는 것이죠. 용서는 바로 사랑이기도 합니다. 여의도 질주범으로 인해 사랑하는 손자를 잃은 할머니가 그 범인을 용서한다는데 왜 나라에서는 그런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까?”(평화신문 1993년 새해 특별대담 중 사형 폐지를 주장하며)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무슨 보복이나 원수를 갚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 바로세우기를 위해섭니다. 책임자는 분명히 나타나야 하고, 법에 의해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평화신문 1996년 신년대담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삶이 뭔가, 삶이 뭔가 생각하다가 너무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기차를 탔다 이겁니다. 기차를 타고 한참 가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이라고 하는 거죠.”(2003년 11월 서울대 초청강연 중)
“내가 제일 바보 같다.”(2007년 10월 모교인 동성중·고 100주년 기념전에서 동그란 얼굴에 눈, 코, 입을 그리고 밑에 ‘바보야’라고 적은 자화상을 선보이며)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까?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제7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성탄절 미사 강론)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1980년 정초, 12.12 이후 인사차 방문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의 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물은 것처럼 '네 아들, 네 제자, 네 국민인 박종철군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1987년 고 박종철 추모 및 고문 추방을 위한 미사 강론)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종교가 왜 정치에 간섭하려 드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가 사회를 순화하고, 도덕적 향상을 이룩하고, 영적 가치로 삶의 공백을 메워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종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문에 다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1988년 한국일보 인터뷰)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복이나 원수를 갚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해섭니다. 책임자는 분명히 나타나야 하고, 법에 의해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1996년 신년 특별대담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1980년 정초, 12.12 이후 인사차 방문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종교가 왜 정치에 간섭하려 드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가 사회를 순화하고, 도덕적 향상을 이룩하고, 영적 가치로 삶의 공백을 메워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종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문에 다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1988년 한국일보 인터뷰)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복이나 원수를 갚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해섭니다. 책임자는 분명히 나타나야 하고, 법에 의해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1996년 신년 특별대담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촉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