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무대 뒤에 감춰진 인간 김봉남이 더 빛났다
헤럴드경제 | 입력 2010.08.13 10:52 | 수정 2010.08.13 10:58
앙드레김은 세간에 알려진 것 외에도 감춰진 면모가 더 많은 인물이다. 대인다운 큰 인물이면서도 지극히 섬세하고, 고집스런 측면도 많이 품고 있었다.
국내에서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앙드레김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다. 앙드레김의 트레이드 마크인 상징인 옷부터 특별제작한 흰부츠까지 하얀복장 영어를 섞어 쓰는 말투 등 패션 외적으로도 그는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지난 1999년 정관계를 뒤흔들었던 '옷로비'청문회에 불려나와 본명이 김봉남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대중의 입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이후 앙드레 김은 각종 TV프로그램과 신문 등에 자주 초대돼 큰 인기를 누렸다.
특히 머리카락을 이마 윗부분까지 새카맣게 칠하는 헤어스타일, 진한 메이크업과 향수는 그를 다른 이들과 확연히 구별짓게 하는 요소. 어릴 때부터 눈을 무척 좋아해 39세부터 흰옷만 입기도 했다. 그는 "방송에서 내 성대모사를 하는 게 처음엔 너무 민망스러웠다. 그런데 이미지에 마이너스가 전혀 안됐다"며 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앙드레 김은 광적인 클래식팬이기도 했다. 특히 성악과 오페라를 좋아했고, 특급 콘서트는 빠지지않고 관람했다. 공연장 맨 앞줄, 가운데 좌석 7,8매를 직접 구입해 외국대사관 관계자를 즐겨 초청하곤 했다. 민간외교사절다운 풍모였다. 이에 클래식 음악계에선 "앙드레 김이 관람하지 않는 공연은 별볼일 없는 공연이다"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앙드레김은 중국및 아시아권에선 한류스타 못지않게 인기가 높았다. 그 자신 엔터테이너이자 스타였던 것. 정부가 해외에서 여는 각종행사에 앙드레김이 특별이벤트로 즐겨 초청되는 것도 주최측에서 "앙드레 김을 꼭 보내달라. 그가 더 유명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화려한 패션과는 달리 그의 식사와 생활은 의외로 소박했다. "사람들은 내가 맨날 호텔에서 근사한 식사를 하는 줄 안다. 그러나 나는 5000원이상 짜리 점심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다. 밥 먹는데 너무 오랜 시간과 돈을 들이는 건 정말 낭비다"라고 되뇌곤 했다. 남을 초대할 때는 화려한 곳을 가지만 자신은 의외로 소탈한 생활을 했던 것.
앙드레 김의 뒤에는 수십년 넘게 그와 동거동락했던 비서실장이 있었다. 비서실장은 그를 지근거리에서 챙기며 온갖 일을 도맡았다. 하지만 그는 "기억력이라든가 치밀함에선 선생님을 결코 따를 수 없었다. 한번 들은 이름도 수십년째 외우고 있을 때가 많아 수시로 혀를 내두르곤 했다"고 토로했다. 또 아침이면 십여종이 넘는 신문(영어신문까지)을 꼼꼼히 챙기며 숙독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대해선 집요할 정도로 치밀하기도 했다.
앙드레 김은 자신의 작업실을 부티크라고 하지 않았다. 대다수 패션디자이너들이 부티크라는 용어를 쓰는데 반해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둘때 까지 아뜰리에라는 말을 고집했다. 또 자신을 톱 디자이너로 부르는 것도 마땅찮아 했다. 본인은 흔하디 흔한 패션디자이너와는 궤를 달리 하는, 아티스트로 불리길 원했다. 때문에 그는 패션산업적 측면에선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는 평을 듣고 있다. 물론 그는 50대 이후에 접어들며 자신의 이름을 화장품 속옷 골프웨어는 물론 심지어 조명이라든가 아파트 등에 쓰도록 하는 라이센싱 사업을 다각도로 펼쳤다.
그는 음담패설도 싫어했고, 스캔들이 많은 스타들은 절대 기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세 또한 일부러 삐딱하게 앉는 것조차 피할 정도로 단정과 매너를 고집했다. 영원한 순백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그는 지난해 경기도 기흥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아틀리에를 조성하기도 했다. 이곳을 둘러봤던 한 관계자는 "선생님이 아마도 죽음을 준비하며 자신의 순백의 성지를 마지막 사업으로 만든 듯하다"고 전했다.
헤럴드생생뉴스/online@heraldm.com
국내에서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앙드레김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다. 앙드레김의 트레이드 마크인 상징인 옷부터 특별제작한 흰부츠까지 하얀복장 영어를 섞어 쓰는 말투 등 패션 외적으로도 그는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지난 1999년 정관계를 뒤흔들었던 '옷로비'청문회에 불려나와 본명이 김봉남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대중의 입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이후 앙드레 김은 각종 TV프로그램과 신문 등에 자주 초대돼 큰 인기를 누렸다.
특히 머리카락을 이마 윗부분까지 새카맣게 칠하는 헤어스타일, 진한 메이크업과 향수는 그를 다른 이들과 확연히 구별짓게 하는 요소. 어릴 때부터 눈을 무척 좋아해 39세부터 흰옷만 입기도 했다. 그는 "방송에서 내 성대모사를 하는 게 처음엔 너무 민망스러웠다. 그런데 이미지에 마이너스가 전혀 안됐다"며 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앙드레김은 중국및 아시아권에선 한류스타 못지않게 인기가 높았다. 그 자신 엔터테이너이자 스타였던 것. 정부가 해외에서 여는 각종행사에 앙드레김이 특별이벤트로 즐겨 초청되는 것도 주최측에서 "앙드레 김을 꼭 보내달라. 그가 더 유명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화려한 패션과는 달리 그의 식사와 생활은 의외로 소박했다. "사람들은 내가 맨날 호텔에서 근사한 식사를 하는 줄 안다. 그러나 나는 5000원이상 짜리 점심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다. 밥 먹는데 너무 오랜 시간과 돈을 들이는 건 정말 낭비다"라고 되뇌곤 했다. 남을 초대할 때는 화려한 곳을 가지만 자신은 의외로 소탈한 생활을 했던 것.
앙드레 김의 뒤에는 수십년 넘게 그와 동거동락했던 비서실장이 있었다. 비서실장은 그를 지근거리에서 챙기며 온갖 일을 도맡았다. 하지만 그는 "기억력이라든가 치밀함에선 선생님을 결코 따를 수 없었다. 한번 들은 이름도 수십년째 외우고 있을 때가 많아 수시로 혀를 내두르곤 했다"고 토로했다. 또 아침이면 십여종이 넘는 신문(영어신문까지)을 꼼꼼히 챙기며 숙독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대해선 집요할 정도로 치밀하기도 했다.
앙드레 김은 자신의 작업실을 부티크라고 하지 않았다. 대다수 패션디자이너들이 부티크라는 용어를 쓰는데 반해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둘때 까지 아뜰리에라는 말을 고집했다. 또 자신을 톱 디자이너로 부르는 것도 마땅찮아 했다. 본인은 흔하디 흔한 패션디자이너와는 궤를 달리 하는, 아티스트로 불리길 원했다. 때문에 그는 패션산업적 측면에선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는 평을 듣고 있다. 물론 그는 50대 이후에 접어들며 자신의 이름을 화장품 속옷 골프웨어는 물론 심지어 조명이라든가 아파트 등에 쓰도록 하는 라이센싱 사업을 다각도로 펼쳤다.
그는 음담패설도 싫어했고, 스캔들이 많은 스타들은 절대 기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세 또한 일부러 삐딱하게 앉는 것조차 피할 정도로 단정과 매너를 고집했다. 영원한 순백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그는 지난해 경기도 기흥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아틀리에를 조성하기도 했다. 이곳을 둘러봤던 한 관계자는 "선생님이 아마도 죽음을 준비하며 자신의 순백의 성지를 마지막 사업으로 만든 듯하다"고 전했다.
헤럴드생생뉴스/online@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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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있었던 앙드레김 패션쇼 (서울=연합뉴스) 한국 패션의 거목 디자이너 앙드레 김(본명 김봉남·75)씨가 12일 오후 7시25분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앙드레 김은 지난달 말 폐렴 증세로 서울대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사진은 2010년 열린 앙드레 김 패션쇼. 고인의 패션쇼는 사랑, 이별, 아픔과 결혼이라는 주제들이 승화 돼 한편의 드라마처럼 관객들에게 다가섰다. << 연합뉴스DB >> |
트렌드 배제..잘 짜여진 공연같은 패션쇼 추구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극단적 노출을 피하고 여성의 지성미와 우아함을 강조하는 독창적인 패션 세계로 주목받았다.
흔히 '일곱 겹 드레스'로 대변되는 그의 패션 키워드는 '꿈과 환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생전 즐겨썼던 '로맨틱'(romantic. 낭만적인)이나 '판타스틱'(fantastic.환상적인) 같은 단어에서 그가 추구했던 패션의 이상이 드러난다.
"의상에는 꿈과 환상이 담겨져야 한다"고 했던 그의 패션 철학은 무엇보다 패션쇼에서 잘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다른 패션디자이너들이 패션쇼에서 다음 시즌에 유행할 의상을 선보이는 것과는 달리 앙드레 김의 패션쇼는 트렌드를 따르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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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키스를 (고양=연합뉴스) 배재만 기자 = 3일 경기도 고양 킨텍스에서 개막한 `2010 디지털케이블TV쇼' 축하 이벤트로 열린 '앙드레김 패션쇼'에서 메인 모델로 나선 슈퍼주니어의 최시원과 f(x)의 설리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0.3.3 scoop@yna.co.kr http://blog.yonhapnews.co.kr/f6464 |
앙드레 김 자신도 트렌드를 따르기보다는 스토리가 있는 한편의 잘 짜여진 공연처럼 패션쇼를 연출했다. 모든 패션쇼를 직접 기획하고 콘티를 짜며 배경음악까지 본인이 편집해 구성하는 것 역시 자신의 패션철학을 패션쇼에서 응집해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저는 패션쇼를 종합예술의 스테이지로 생각하죠.(중략) 일반적인 패션쇼에서는 앞으로 나타날 트렌드를 알려주고 또 상품을 홍보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저는 달라요. 그 어떤 종합예술적인 감동, 가슴을 파고드는 애틋함,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독감과 그리움, 슬픔, 숭고한 사랑, 가슴을 파고드는 아름다움, 그것들이 혼합된 세계가 이루는 분위기가 저는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회고록 '마이 판타지'중)
그의 의상은 또 '품위'를 강조하며 노출을 자제한 것이 특징이다.
"의상은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추구하는 패션 철학은 인텔렉추얼한, 지성적이면서도 교양미 있는 품위를 소중히 생각합니다. 배꼽이나 가슴을 노출해야만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옷을 입었을 때 정신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추구하는 의상에서는 시대적인 변화와 함께 가장 지적인, 영원한 아름다움이 풍겨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2005년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
앙드레 김은 또 동양적 신비감을 표현하는데도 신경을 썼다. 중국이나 태국 등 아시아 각국에서 패션쇼를 열 때마다 각국의 전통 문양을 사용해 의상을 디자인함으로써 해당 국가의 느낌을 전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특히 일류 디자이너의 조건으로 특이하게 '국가관'과 '사명감'을 꼽기도 했다. 한국인이며 아시아인이며, 동양인이라는 자부심이 패션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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