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딘
시원한 차창의 바람을 맞으며 단숨에 맨체스터를 향해 달려서 링컨가의 여름 별장인 하일딘(Hildene)을 제일 먼저 찾았다. 링컨의 아들 로버트 토드 링컨(Robert Todd Lincoln)이 지은 집이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따라서 지금도 영업 중인 유서 깊은 맨체스터의 에퀴녹스 호텔에서 묵은 적이 있는데 그로부터 40년 후에 맨체스터를 다시 찾아와서 바텐킬 계곡과 주변의 산들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는 약 60여만평의 땅을 사서 조지안식 이층집 장원을 지어 1905년에 완공했다. 그가 어려서 맨체스터에 대해 어떤 인상을 받았길래 아무 연고도 없는 이 계곡을 찾아와 평생 살 터전을 꾸렸을까? 하일딘은 숲속으로 난 외길을 꽤나 오래 들어가야 그 모습을 보여준다. 이곳은 연중 문을 열고 있어 집안 곳곳을 자세히 둘러볼 수 있었다.
잘 정돈된 고가구를 구비하고 있는 거실과 서재, 식당, 침실 등 24개의 방은 링컨 가족들이 사용하던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고 대단한 재력가의 방이었음을 보여주었다. 벽난로는 티파니 유리 타일로 장식되어 있었다. 티파니 유리 공예와 보석 공예는 대단한 것인가 보다. 여행 내내 티파니 유리임을 강조하는 얘기를 자주 듣게 된다. 내가 영화 제목으로만 알고 있던 티파니가 귀중하고 값 비싼 장식품의 대명사로서 반드시 자랑거리로 소개되고 있었다. 조사해보니 티파니 유리는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Louis Comfort Tiffany, 1848-1933)가 설립한 티파니 스튜디오에서 1878년부터 1933년까지 만든 유리 공예품을 말하는 것으로 특히 그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최고의 명품으로 인정받는다. 그는 티파니 보석상을 설립한 찰스 루이스 티파니의 아들로서 유럽 여행에서 중세시대의 유리제품에 깊은 감명을 받고 아름다운 색과 디자인을 표현한 유리 공예를 발전시켜서 미국의 국보적 존재가 되었던 인물이다.
우리 외에 다른 팀 두 명이 관람객의 전부였다. 안내인이 질문할 것이 있으면 하라고 친절하게 일러주며 사진을 찍어도 좋다고 알려준다. 서재를 구경하고 있는데 안내인이 거실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했다. 쩌렁쩌렁 울리는 파이프 오르간의 웅장한 소리가 집안 전체에 울려 퍼졌다. 거실에서 바라다 보이는 2층 계단 중간에 1000개의 파이프가 들어서 있었다. 파이프 오르간 반주에 따라 2층 계단에 설치된 파이프에서 울려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1층 홀에서 춤과 음악의 파티가 열렸던 것 같다. 백년이 넘은 파이프 오르간이 아직도 우렁찬 음색을 자랑하며 매일 연주되고 있다. 홀의 가운데 정문을 열면 아름다운 정원이 바로 눈 앞에 펼쳐지며 멀리로는 막힘이 없는 버몬트주의 그린마운틴 자연경치가 파란 하늘과 함께 한 눈에 들어온다.
2층에는 후손들의 침실이 몇 개 있었으며, 한쪽에는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과 남북전쟁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는 글과 그림, 흉상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사진과 데드 마스크까지 전시되어 있었다. 미국에서 링컨 대통령의 자료를 가장 많이 갖고 있다고 한다. 링컨 대통령의 업적과 노예해방의 과정을 설명하는 글과 역사적 사실들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 놓아서 링컨 대통령의 소기념관이라고도 할 수 있게 꾸며 놓았다.
저택 앞 정원은 바텐킬 계곡을 시원하게 내려다보는 언덕위의 정원인데 기하학적 프랑스식 정원이다. 정원을 멀리서 보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듯 보이지만 정원의 끝으로 가보면 산과 정원 사이에 깊은 바텐킬 계곡이 장엄한 파노라마를 이루며 펼쳐져 있다. 정원은 쥐똥나무 생울타리로 기하학적으로 구획하고 각각의 구획별로 다른 색의 꽃과 초화류를 심어 넣어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보이게 설계했다. 정원에는 유난히 작약꽃이 많았는데 한창 꽃봉오리들이 맺고 있었다. 이 작약 꽃봉오리들이 6월 중순이 되면 만발하여 1,000송이 이상의 꽃이 핀다고 한다. 작약꽃을 매우 좋아하는 링컨부인은 이 꽃이 필 때면 지인들을 초대하여 꽃을 감상하며 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정원의 한쪽에 거대한 바위가 솟아있고 큰 그늘 나무가 서있어서 한국 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적 운치를 더해주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고, 계곡을 내려다보는 절벽의 돌담에 서면 시원한 바람과 드넓은 시야가 최고의 정원임을 실감나게 한다. 포멀 가든 옆으로는 완경사의 넓은 초원과 여러 가지 채소를 키우는 키친 가든, 쉼터, 오두막 등이 정겹게 전개되어 있다. 잘 다듬어진 기하학적 정원과 그 둘레에 펼쳐진 자연 그대로의 풍경이 오버랩되며 가슴 깊은 곳 까지 시원한 감동을 준다.
현재 기념품점 겸 매표소로 사용되는 건물은 원래는 링컨가의 마차고였다는데 매우 크고 쓸만한 건물이다. 정원 구경을 마치고 기념품을 고르다가 보니 천정에 여러 도시의 이름과 함께 금액이 붙어있어 연유를 물어보니 풀만 기차를 복원하기 위하여 모금 활동을 하고 있는데 각 도시별로 현재까지 모금된 금액을 표시한 것이란다. 로버트 링컨은 풀만 궁전기차 회사를 운영했었는데, 궁전기차란 기차에 침대를 비롯한 편리한 의자와 테이블 등을 갖춘 고급 특실형 기차다.
이 저택은 버몬트주에서 구입하여 관리하며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특권층의 화려한 부와 재산이 결국 국가와 일반에게 돌아가도록 후손들과 국가가 잘 협력하는 것이 그들 특권층이 누린 호사를 욕되게 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에퀴녹스산
5월 17일,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가 화창해서 반가웠다. 오늘은 에퀴녹스(Equinox)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스카이라인 드라이브(Skyline Drive)로 시작했다. 해발 1,175m의 산인데 민간회사가 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도로를 만들어서 통행료를 받는다. 산 정상에서는 시야가 확 트여 동쪽으로 버몬트의 그린 마운틴즈와 뉴햄프셔의 화이트 마운틴즈를 볼 수 있고, 서쪽으로는 날씨가 맑은 날에는 뉴욕주 최대의 산림공원 아디론댁(Adirondacks)을 볼 수 있다. 자세히 보면 북쪽으로 캐나다 몬트리얼의 로얄산까지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산 정상에 올라가보니 사방이 나무에 둘러싸여 조망이 잘 안되어서 답답했으며, 전망대 공사가 대규모로 진행중에 있었다. 표지판을 살펴보니 전망바위(Lookout Rock)라는 안내문구가 있어서 그곳으로 향했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좁은 산길을 따라 약 20여분 동북쪽으로 걸어 내려가서 드디어 전망바위에 서니 탁트인 시원한 전망을 조망할 수 있었다. 한 눈에 보이는 산들은 봉분마냥 넘실넘실 한없이 멀리 이어지고 있었다. 해발 1,130m의 전망바위 아래쪽으로 산과 산 사이에 너른 분지가 있고 그곳에 포근하게 둥지를 튼 맨체스터 빌리지의 전통 가옥 마을이 숲속에 점점이 아득하게 내려다 보였다. 망원렌즈를 통해 풍경을 당겨서 보니 하얀 교회와 꽤 고층의 흰 건물들이 조화롭게 배치된 상당히 큰 동네였다. 동네의 중심가는 녹색 자연과 흰색 건물만 보여서 깨끗하고 깔끔하였으며, 주변의 가옥들도 숲과 골프장 사이사이에서 자신을 특징짓지 않고 무채색으로 전체적으로 조화된 통일감을 주며 서 있었다.
다시 차를 주차해 둔 산 정상으로 올라가서 차를 몰고 내려가는데, 내려가는 길 곳곳에 전망 좋은 포인트가 있어서 차를 내려 감상하곤 했다. 제1봉(Big Equinox)에서 약간 내려가다 보면 맞은편에 제2봉(Little Equinox)이 보이고 그 사이에 산 아래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있는데, 바로 이 갈림길이 넓은 시야를 주는 전망 좋은 포인트로서, 서쪽으로 앙징맞게 내려다 보이는 카투시안 수도원(Carthusian Monastery)과 마들렌 호수(Lake Madeleine)는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호수 옆 숲속에 파묻힌 거대한 화강암 건물 속 수도원은 외부와 단절된 은둔과 고요 속에 수도를 하는 곳으로 내부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서점과 기념품 판매점을 방문할 수 있고 아름다운 피크닉장에서 도시락을 먹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다음 일정을 위해 수도원에 들르지는 않았다. 에퀴녹스산의 이 드라이브 도로는 길이가 약 8.5km이며 조셉 데이비슨(Joseph G. Davidson)이 산을 사들여 1939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1953년에 완공한 뒤에 카투시안 수도회에 기증하였으며, 1960년에 수도원이 건설되었다.
카투시안 수도원은 이탈리아의 콜로냐에서 태어나고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성 부르노(St. Bruno Hartenfaust, 1030-1101)가 정치에 물든 종교에 염증을 느끼고 1084년에 프랑스 그르노블 근처의 깊은 숲속에서 그를 따르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수도 생활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속세를 떠나 깊은 산이나 동굴에서 예수의 제자들을 본받는 삶을 살기위하여 수도 생활을 했으며, 종교개혁 시기에는 유럽 전역에 약 200개소의 카투시안 수도원이 있었다. 이들은 종교개혁도 인정하지 않아 많은 박해와 공격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더욱 세상과 절연하고 검약하고 엄격한 수도 생활을 지켜나갔다. 이 에퀴녹스 수도원도 높은 벽을 성처럼 둘러서 세상과 완전 차단된 채로 외부사람들에게는 일체 개방하지 않는다고 한다.
산을 내려와 아름다운 자연 그대로의 바텐킬강을 따라 드라이브를 했으나 역시 강가를 따라 자리잡은 개인주택들 때문에 강가로 접근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볼 수 있는 플라이낚시에 의한 송어잡이가 유명한 곳이지만 아직 시즌이 일러 낚시광경을 볼 수는 없었다. 비시즌이라 호젓하고 편리하긴 한데 대신 볼 것이 많이 생략되는 것이 너무 아쉽다. 초록의 잎과 갈색 나무 가지가 녹아있는 듯한 특이한 녹갈색을 띠며 흘러가는 바텐킬강의 강물은 또 하나의 이국적 자연 풍경이다.
그라프턴 & 뉴패인
확실한 안내서가 없이 바텐킬강 여기 저기를 기웃거려 보았지만 경치 좋은 곳은 모두 개인 사유지고, 캠핑장으로 찾아들어가 보았으나 사람 구경하기도 어려워서 맨체스터를 떠나 인근의 아름다운 소도시로 소개된 그라프턴(Grafton)과 뉴패인(Newfane)으로 향했다. 에퀴녹스산 입구에서 그라프턴까지 37.5마일 약 1시간 거리다. 버몬트 주도 7A 북쪽으로 진행하다가 맨체스터 센터 로타리에서 주도 11번 동쪽과 121번 동쪽을 타고 그라프턴에 도착했다. 작지만 단단한 품격을 느낄 수 있는 도시였지만 수많은 아름다운 소도시 중의 하나였다.
뉴잉글랜드에서 아름다운 소도시라고 소개된 곳을 찾아가보면 비슷한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 대개 역사가 약 200년 이상된 영국풍의 마을이다. 메인 스트리트에 높은 첨탑을 한 교회가 마을의 수호신인양 고상하게 자리잡고 있고, 거리의 끝에는 역시 약 2세기 이상에 걸쳐 마을의 웃고 울던 온갖 사연을 전설처럼 간직하고 있는 술집 겸 여인숙인 주막(Tavern)이 있다. 마을의 한쪽에는 큰 시냇물이 흐르고 단아하게 지어진 고옥들이 반짝이는 역사를 자랑하며 잘 가꾸어진 화단과 함께 기품을 뽐내고 있다.
그라프턴의 겨울 설경 사진을 보면 하얀 첨탑이 솟은 교회가 산을 배경으로 시선을 잡아당기는 가운데 마을의 집 전체가 회색 지붕에 흰 페인트 칠의 판자집들로서 내가 어렸을 때 많이 보았던 크리스마스 카드에 그려진 풍경을 보는 듯 산뜻하다. 이곳은 옛날에 보스턴에서 캐나다의 몬트리얼로 가는 길에 하룻밤을 묵고 지나가는 마을로서, 1801년에 문을 연 주막이 지금도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채 3층의 하얀 건물에 30여개의 방을 갖추고 영업을 하고 있다. ‘정글북’이라는 단편집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국 작가 키플링(Kipling)은 이 마을을 매우 좋아해서 1892년에 이 마을로 신혼여행을 왔다고 한다. 원래 이 마을은 활석(soapstone) 채석장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다가 19세기 말에 활석이 고갈되면서 쇠퇴해서 폐허가 될 운명에 처하였다. 그런데 우연히 이 마을을 찾은 한 사람이 채석장이 있던 곰산(Bear Mountain)과 색스턴강(Saxtons River)이 자아내는 이 마을의 아름다운 풍광과 영국풍의 산뜻한 집들에 반해서 이 마을에 투자를 하며 지역발전전략을 지역 주민들에게 제시하여 마을을 가꾸면서 마을의 주요 산업인 낙농업을 치즈산업으로 발전시켜서 오늘날에도 체다치즈(Cheddar cheese) 생산이 버몬트주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인구 600여명의 소도시로서 지금은 관광객이 우리 밖에 없지만 가을 단풍철에는 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북적인다고 한다.
뉴패인은 그라프턴에서 남쪽으로 15분 거리에 있다.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한다면 영국민족은 백주민족이라고 해야 할라나? 뉴잉글랜드의 역사가 깊은 소도시들의 집은 대부분 하얀집이다. 뉴패인의 중앙광장에 자리한 대표적 건물인 교회와 법원, 타운홀과 주막도 모두 하얗다. 초록색 잔디와 수목 그리고 파란 하늘이 하얀 건축물과 대비되면 순결함 그 자체다. 싱그럽고 신선하다. 그래서 뉴패인은 뉴잉글랜드의 대표적 포토존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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