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는 1955년 2월 2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지 몇 주 만에 입양기관을 거쳐 입양됐다. 잡스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고 말했다. 잡스의 생부 압둘파타 존 잔달리(80)와 생모 조앤 심슨은 위스콘신대 대학원에 다닐 때 캠퍼스 커플로 만났지만 "딸을 시리아인 유학생과 결혼시킬 수 없다"는 심슨 부친의 반대로 미혼 상태에서 잡스를 낳았다. 잡스는 '대학 진학을 확실히 책임지겠다'는 양부모 폴·클라라 잡스에게 맡겨져 캘리포니아 마운틴뷰에서 자랐다.
- ▲ 1983년 11월 당시 28세의 스티브 잡스(왼쪽에서 둘째)가 방한,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에서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왼쪽)을 만났다. 73세였던 이 회장은 당시 잡스에 대해 "굉장히 훌륭한 기술을 가진 젊은이" 라고 말했다. /삼성그룹 제공
어린 시절 잡스는 호기심이 강해 늘 말썽을 일으켰다. 집 구석에 놓인 바퀴벌레약을 먹고 거의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전자 부품을 조립해 만드는 장난감을 갖고 놀면서 기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정학·무단결석을 밥 먹듯 했지만 새로운 기술에 대한 열정을 버리진 않았다.
잡스는 오리건주 리드대 철학과에 입학했다가 한 학기 만에 공부를 때려치운다. 그는 중퇴 이유에 대해 "부모님이 비싼 학비를 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고 훗날 고백했다. 당시 친구의 방바닥에서 자고, 먹을 것을 구하려 콜라병을 반납해 5센트를 모았으며 한 종교 단체에서 일주일에 한 번 주는 식사를 얻어먹으려고 7마일(약 11.3㎞)을 걸어가기도 했다.
히피 저항 문화에 휩쓸려 밥 딜런과 비틀스에게 빠져 살았던 잡스는 자퇴 후 다니던 전자게임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불교로 개종해 아내 로린 파월과 결혼식도 불교 의식으로 진행했다.
그는 1976년 다섯 살 많은 '동네 형' 스티브 워즈니악과 애플을 공동 창업한다. 사무실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양부모 집의 창고였다. 잡스는 이듬해 개인용 PC 애플2를 내놓으면서 PC 대중화를 이끌었다.
하지만 30세 때인 1985년 자기가 영입한 CEO 존 스컬리와 이사회에 의해 쫓겨나는 아픔을 겪었다. 그동안 내놓은 매킨토시가 가격 경쟁에서 밀리면서 실패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 됐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컴퓨터 개발사 넥스트와 컴퓨터그래픽(CG) 영화사 픽사를 설립해 성공했다. 그는 1996년 경영난을 겪고 있는 애플로 복귀해 신화를 쓰기 시작한다. 2001년 아이팟, 2007년 아이폰, 2010년 아이패드를 잇따라 성공시키면서 디지털 시대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7년 PC 시대를 열었던 그는 PC 이후 시대까지 열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올해 1월 병가를 낸 데 이어 지난 8월에는 CEO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잡스와 함께 애플을 공동 창업한 워즈니악과 애플의 경쟁사인 구글 CEO를 역임한 에릭 슈미트는 잡스 사임 당시 "이 시대 최고의 CEO"라고 말했다. 그는 췌장암 판정 후 '죽음'을 언급하는 일이 잦아졌다. "인생의 중대 선택을 앞두고 스스로를 돕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상기하는 것이다" "묘비에 '최고 부자 잠들다'는 글귀엔 관심이 없다. 오늘 밤 잠자리에 들 때 '오늘 굉장한 일을 해냈지'라고 말하는 게 중요하다"…. 그는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나는 암 진단을 받았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다. 죽음은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에 길을 내준다"고 말했다. 그는 스탠퍼드대 연설 말미에서 "늘 갈망하고 늘 우직하게 살라(Stay hungry. Stay foolish)"고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잡스가 이끈 제품은 단순한 전자기기가 아니었다. 혁신의 산물이었다. 그는 "혁신은 우리가 절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일, 정말 많은 노력을 투입했다고 생각하는 1000가지 일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데서 나온다"고 말했다. 잡스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아나섰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데 그게 상당히 괜찮은 일이라면 거기에 너무 오래 머무르지 말고 다른 놀라운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다음에 무엇을 할지 생각해 내십시오."(2006년 5월 NBC뉴스 인터뷰)
그는 '나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23세 때 여자 친구 크리스 앤과 사이에 딸 리사가 태어났지만 혈육임을 부인했다. 양육비도 주지 않아 미혼모 앤이 근근이 정부 보조금을 받아 아이를 키웠다. 나중에 성장한 딸이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하자 그제야 자기 딸로 받아들였다. 그는 올해 "나는 자랑스럽지 못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면서 당시 일을 언급했다. 생부가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제안했지만 끝내 매몰차게 외면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독재자'나 '사소한 일에까지 목숨 건 관리자'가 되길 마다하지 않았다. 디자인·광고 문구에도 관심이 많아 300개 특허와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는 카피 탄생에 관여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 각계 각층에서 애도를 표하고 있다. 인터넷에는 아이패드(iPad)에서 따온 '아이새드(iSad)'라는 추도사가 퍼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립자 빌 게이츠는 잡스가 자주 썼던 표현을 인용하며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정말로 대단한 영광(insanely great honor)'이었다"고 말했다. IT 분야 싱크탱크인 엔드포인트 테크놀러지의 로저 케이 소장은 "전체적인 영향으로 본다면 스티브 잡스는 토머스 에디슨이나 그레이엄 벨에게 비견될 만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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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년 11월 당시 28세의 스티브 잡스(왼쪽에서 둘째)가 방한,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에서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왼쪽)을 만났다. 73세였던 이 회장은 당시 잡스에 대해 "굉장히 훌륭한 기술을 가진 젊은이" 라고 말했다. /삼성그룹 제공
[혁신의 아이콘, 잡스]
기술과 경영의 융합 - 음악사이트 아이튠즈로 음악 비즈니스 모델 바꿔
공학과 예술의 융합 - 군더더기 하나없는 디자인, 아이폰 등 모든 제품 적용
- ▲ 다빈치 자화상
세계적인 경제전문잡지 이코노미스트는 작년 2월 애플의 태블릿PC 아이패드를 들고 있는 스티브 잡스 CEO를 표지모델로 등장시켰다. 표지 속의 잡스는 예수의 모습이었다. 성경 대신 아이패드를 들고 있고 '잡스의 성서(The Book of Jobs)'라는 소제목이 붙었다. 잡스의 얼굴 뒤에는 예수처럼 후광이 비쳤다. 잡스의 표지 사진은 당시 신성모독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적어도 IT업계에서는 잡스가 구루(스승)를 넘어 거의 신격화될 정도로 추앙을 받았다.
잡스가 혁신의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매킨토시 컴퓨터(1984년), MP3 플레이어 아이팟(2001년), 아이폰(2007년)·아이패드(2010년) 등을 통해 인간의 창의성과 상상력이 빚을 수 있는 최고의 제품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잡스를 직접 만났던 이석채 KT 회장은 올해 1월 기자간담회에서 "잡스 CEO는 혁명적인 업적을 이룬 사람이며, 그가 아프면 인류의 손실"이라고까지 평가했다.
◆인문학과 IT의 '융복합'의 진수를 보여준 21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
세계 IT업계는 2000년대 초부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콘텐츠가 하나의 서비스로 결합하는 IT 융복합화를 구호처럼 외쳐왔다. 융복합화의 비전 아래 일본 소니가 1980년대부터 할리우드의 대형 영화사와 음반사를 인수하며 콘텐츠 분야에 뛰어들었고 일본 1위의 이동통신업체인 NTT도코모는 막강한 자금력을 동원해 미국과 유럽의 이동통신업체 지분을 인수하며 자신들이 창안한 휴대폰용 콘텐츠 서비스 '아이모드'를 확산시키는데 안간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음악 콘텐츠와 하드웨어 사이의 장벽을 깨뜨린 인물은 당시만 해도 '실리콘밸리의 이단아'라고 불렸던 스티브 잡스 CEO였다. 그는 소니처럼 수조원씩 투자해 음반사를 인수하는 대신 '아이튠즈'라는 음악 거래사이트를 만들어 단번에 온라인 음악 유통 시장을 장악했다. 엔지니어이면서 비즈니스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잡스였기에 온라인 음악거래 사이트라는 독창적인 비즈니스모델을 창안해 유통망을 장악한 것이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IT 전략컨설팅업체 델파이그룹의 토마스 쿨로폴루스 CEO는 "애플의 MP3 플레이어 아이팟을 구성하는 하드웨어와 콘텐츠 중에서 애플이 직접 개발한 것은 하나도 없다"며 "애플은 이미 개발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기능적으로 잘 통합(integrate)하고 여기에 음악 콘텐츠를 결합해 새로운 서비스를 창안했다"고 말했다.
- ▲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490년쯤 그린 ‘인체 비례’ 그림에 스티브 잡스의 사진을 합성했다. 잡스는 테크놀로지와 콘텐츠를 융합시켜 새로운 가치를 만든 현대판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그래픽 이철원기자 burbuck@chosun.com
철학과 서체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인문학적인 소양은 아이팟과 아이폰의 탁월한 사용자 환경(user interface)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아이폰이나 아이팟 포장에 사용설명서가 없어도 누구든 쉽게 아이폰을 조작할 수 있고 아이폰으로 보여주는 글자들이 매끄럽고 세련돼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편집광적인 완벽주의
세계 최대의 반도체 기업인 인텔의 앤디 그로브 전(前) CEO는 "(집요한)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고 했다. 변화무쌍한 IT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편집광처럼 자신의 일에 매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앤디 그로브의 교훈을 철저히 지킨 인물이다. 스티브 잡스는 창의적인 CEO이면서 누구보다도 디테일(detail)에 강한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때도 조명이 켜지는 순서와 위치, 조도에까지 신경을 쓸 정도였다. 그가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하다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심지어는 제품 포장지의 손잡이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컴퓨터 디자인을 다시 하라고 한 적도 있다.
잡스는 탁월한 직관력(intuition)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아이팟이나 아이폰 등 회사의 사활이 걸린 제품을 출시할 때 단 한 번도 소비자 조사를 한 적이 없다. 그는 시장 분석이라는 마케팅의 기본 이론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그의 논리는 "소비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진정한 혁신가는 무지(無知)한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국내 IT 업계 한 대표는 "잡스는 자신이 내세우는 제품이나 기능을 소비자들도 좋아하게 만드는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면서 "심지어 그가 억지를 부려도 애플의 팬들은 그를 두둔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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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의 경영과 삶
- ▲ 아인슈타인
고(故) 스티브 잡스의 경영철학은 '극단적인 완벽주의'로 요약된다. 지난해 12월 영국의 경제전문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잡스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FT는 그의 성공 비결을 '강박증에 가까운 완벽주의'로 분석했다. 창의력이 넘치는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디어에 얽매다가 불완전한 제품을 만들곤 하는데, 잡스는 특유의 완벽주의로 독창적이면서도 흠이 없는 물건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잡스의 십계명은 '완벽하게 업무를 챙겨라'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만큼 완벽함을 중시했던 것이다.
◆미니멀리스트(최소주의자)
애플 제품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스마트폰 아이폰은 나사 구멍 하나조차 반듯하게 들어맞아 있고, PC 아이맥은 부품을 이어붙인 흔적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잡스가 '최소의 디자인이 최선의 디자인'이라는 명제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2월 팀 쿡(Cook) 현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애널리스트들과 만난 자리에서 "애플은 사내의 가장 훌륭한 아이디어에 대해 매일같이 '노(No)'를 연발하는 회사"라고 했다. 많은 것을 포기하는 대신 집중하기로 선택한 부분에 에너지를 집약해 그 부분을 세계 최고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애플의 내부 방침은 혁신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에서 나온다는 잡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빈 스컬리 전 애플 최고경영자(CEO)에 따르면, 1980년대 잡스의 집에는 침대 하나, 전등 한 개,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초상화 하나만 있었다. 그 외에는 흔한 장식품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최소한의 완벽한 것만을 자신의 곁에 두는 완벽주의 미니멀리스트의 면모를 드러내는 사례다.
◆직원에는 냉혹, 기부에는 인색
잡스의 완벽주의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직원들에게는 냉혹한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애플은 지난해 아이폰4의 전파 수신 불량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이후 잡스는 안테나 프로젝트 담당자를 조용히 해고했다. 그의 십계명에는 '채찍보다 당근을 주라'고 돼 있지만 실제 행동은 이와 다르곤 했다. 완벽한 제품에 흠결을 남긴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기부에도 인색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앤드루 소킨은 "잡스의 재산은 총 83억달러나 되지만 자선기금을 냈다는 기록이 없다"며 "잡스는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가 부자들이 최소한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자는 취지로 만든 '기빙 플레지(Giving Pledge)' 운동의 회원도 아니며 이 운동 가입 권유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지적했다. 잡스는 1986년 '스티브 P 잡스'라는 이름으로 복지 재단을 만들었지만 1년 만에 문을 닫았고, 1997년 애플에 CEO로 복귀한 후 사내 자선프로그램을 폐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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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비주류인 스티브 잡스가 정보기술(IT) 시장의 마법사로 올라선 것은 우리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잡스는 좋은 집안, 좋은 학벌이 있어야만 가능한 한국 사회의 '성공 공식'과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인물이다.
잡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엔 집안·학벌을 가리지 않고, 실패에 관대한 미국 사회 특유의 개방성과 관용이 큰 몫을 했다.
잡스는 대학원생 신분으로 동거 중이던 시리아계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가에서 아랍계인 아버지를 반대하면서 잡스는 태어난 지 1주일 만에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폴 잡스 부부에게 입양된다. 이들 부부는 그에게 스티브 폴 잡스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잡스는 초등학교 때부터 학업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학교 수업을 자주 빼먹었고, 담임 선생님은 잡스를 학교에 나오게 하느라 사탕과 돈을 쥐여주며 달래야 했다.
잡스의 학교 성적은 시원찮았다. 하지만 유달리 전자제품에 관심이 많았다. 우연히 '히스키트'라는 아마추어용 전기용품세트를 얻게 된 것이 배경이었다. 잡스는 방과후 수업을 통해 IT업계에 대한 이해를 넓혀갔다. 홈스테드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는 휴렛패커드사에서 개설한 방과후 수업을 들으며 컴퓨터에 대한 지식과 흥미를 키웠다. 애플 공동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도 이때 만났다.
잡스는 방과후 수업에서 쌓은 지식과 휴렛패커드사의 인턴 경험을 인정받아 1972년 오리건주 리드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양부모가 비싼 학비를 힘들게 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1학기만 다니고 대학을 중퇴한다.
대학을 중단한 뒤 잡스는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그는 "콜라병을 모아 팔아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한 아랍계 사원에서 주는 무료급식을 먹기 위해 11㎞ 이상을 걸어다니기도 했다.
컴퓨터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고 있던 잡스는 1974년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홈브루 컴퓨터 클럽'이라는 컴퓨터 관련 사교클럽에 나가게 된다. 이곳에서 과거에 만난 적이 있던 스티브 워즈니악을 더욱 깊이 알게 됐고, 워즈니악이 개발한 '애플1'을 갖고 애플사를 공동 창업했다.
잡스는 태어나고 자라면서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이른바 '스펙' 중 단 한 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학도 한 학기만 다녀 학벌도 사실상 고졸이나 마찬가지다. 돈이 없어 양부모의 집 창고에서 애플을 창업한 일화는 잡스의 상징이다.
실패에 관대하고 도전과 창업을 관용적으로 받아들이는 미국 사회의 문화가 없었다면 잡스 신화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잡스의 성공 스토리를 곱씹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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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가 5일(현지시간) 향년 5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애플은 이날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비전을 가진 창의적인 천재를 잃었다"며 잡스의 사망소식을 전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잡스의 일생은 영화보다 더 극적이었다. 불행과 성공의 극단을 달리며 롤러코스터와 같은 삶을 살았다.
1955년 2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잡스는 친부모로부터 버림을 받고 폴 잡스와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됐다.
이후 스티브 잡스는 캘리포니아 서부 샌머테이오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고 1972년 오레곤주의 리드칼리지에 입학한다.
그러나 대학교육이 필요없다고 느낀 잡스는 1학기만 수료한 후 자퇴하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간다.
그는 1974년 비디오게임 제조업체 '아타리'에 입사해 고등학교 동창 스티브 우즈니악과 만나 애플 창립 준비 작업에 들어간다.
2년이 지난 1976년 4월 1일 만우절날 잡스는 우즈니악과 함께 부모님 차고에서 `애플호(號)'에 시동을 걸었다.
잡스와 우즈니악의 첫 작품은 차고의 각종 전자부품을 조립해 만든 '애플 I'로 회로기판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했지만 벤처투자자 관심을 모으기는 충분했다.
1977년 잡스는 투자금을 바탕으로 '애플 II'를 출시하며 시장의 열광적 지지를 얻는 데에 성공한다.
25살 되던 1980년 그는 이미 1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1980년 잡스는 애플 기업공개(IPO)를 통해 1억1000만달러의 자금을 조달받아 1984년 개인용컴퓨터(PC)의 혁명을 몰고 온 '매킨토시'를 시장에 선보인다.
그러나 성공가도를 달리던 잡스도 일생일대의 위기에 직면한다.
그는 1985년 당시의 애플 CEO 존 스컬리와 의견충돌로 밀려나 자신이 세운회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같은 해 우즈니악도 사임한다.
잡스는 그러나 절치부심으로 애플복귀를 준비한다.
1986년 학습용 소프트웨어업체 넥스트와 에니메이션 픽사를 인수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1995년 잡스의 픽사가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Toy Story)'로 대박을 터뜨린 가운데 애플은 시장 요구에 뒤처진 제품으로 파산직전까지 몰린다.
이에 애플 이사회는 퇴출 후 승승장구하는 잡스에게 SOS를 보낸다.
잡스는 1997년 애플고문으로 재입사한 후당시 애플을 이끌던 길 아멜리오가 사임하면서 2000년 애플CEO 자리를 꿰찬다.
애플 사령탑에 복귀한 잡스는 2001년 MP플레이어 '아이팟', 2007년 스마트폰 '아이폰', 2009년 태블릿PC '아이패드' 등 글로벌 인기상품을 내놓으며 혁신의 대명사로 거듭난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지 않던가.
기업인으로 성공했지만 잡스의 건강은 악화하기 시작한다. 2003년 10월 췌장암 진단을 받은 잡스는 이후 8여년 동안 투병생활을 지속한다.
그는 2004년 8월 종양 제거수술을 받고 2009년 1월 두번째 병가를 내고 간 이식수술을 받는다.
그 이후 회사 복귀와 병가를 반복하던 잡스는 올해 초 '무기한 병가'를 낸 뒤 지난 8월에는 CEO자리까지 팀 쿡에게 넘겨줬다.
CEO직에서 물러난 지 2개월만에 잡스는 혁신과 성공을 뒤로 한 채 저 세상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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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살로 숨진 스티브 잡스는 컴퓨터회사를 창업해 큰 성공을 이뤄낸 탁월한 기업인이다. 21살이던 1976년 스티븐 워즈니액과 함께 애플컴퓨터를 창업해, 현재 시장가치 2850억달러의 세계 최고 기술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뛰어난 제품을 만들어 동시대인의 삶의 방식을 바꿔내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혁신가로 기록될 것이다.
■ 다르게 생각해 바꿔라
스티브 잡스는 기존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4년 맥컴퓨터를 선보일 때 내보낸 광고에선 한 여인이 해머를 들고 뛰어가 빅브러더가 지배하는 남성들의 세상을 박살내버리는 모습으로 담았다. 아이비엠(IBM)과 마이크로소프트(MS)가 지배하는 기존의 세상을 부수겠다는 메시지였다. 피시 시장에서 엠에스의 지배를 뒤집지는 못했으나, 스마트폰과 태블릿피시를 앞세운 포스트피시(Post PC) 전략으로 그의 꿈은 이뤄졌다.
뒤집기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전략이 가장 잘 구현된 제품은 아이폰이었다. 애플은 거대 통신사들이 지배하는 통신 환경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2위 이하 사업자와 손잡은 애플은 이동통신사가 단말기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을 극소화하고 소비자와 개발자들을 끌어들여 아이폰발 스마트폰 혁명을 이끌었다. 애플의 아이폰 등장 이후 이동통신 시장의 패러다임은 완전히 바뀌었다. 각국의 이통사들이 통신서비스와 단말 공급권을 갖고 가입자와 제조사를 쥐락펴락하던 구조가 아이폰 하나로 무너진 것이다.
잡스는 기존에 없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썼다. 애플은 기계적 아름다움을 지닌 하드웨어를 만들어 팔면서도, 기계보다는 거기에 담아서 즐길 수 있는 가치를 앞세웠다. 아이팟은 음악관리 도구인 아이튠스와 음원 판매상점인 아이튠스스토어와 결합돼, 디지털시대에 음악을 구매하고 즐기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멀티터치를 채택해 손쉬운 조작법의 중요성을 일깨운 아이폰은 앱스토어를 통해 손쉽게 소프트웨어와 콘텐츠를 구매해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창조했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소프트웨어와 콘텐츠 생태계를 만들어내 디지털 환경에서 성공 모델을 확립한 것도 애플을 이끈 잡스의 몫이다. 지난 4일 아이폰4에스(S) 발표 행사에서 애플은 "지난해에만 앱스토어를 통해 17억8300만달러의 매출을 기록해, 70%를 개발자들에게 돌려줬다"고 밝혔다.
■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바꾸다
잡스는 엔지니어지만, 기술을 넘어 그 사용자인 사람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지녔다는 점과 그를 제품으로 구현해냈다는 점에서 남달랐다. 잡스는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처음 발표하는 자리에서 거듭해 "애플은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에 서 있었다"고 내세웠다. 잡스가 혁신적이라고 설명한 제품의 배경엔 기술 못지않게 인문적 접근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애플이 지향하는 단순화와 쉬운 사용성이라는 지향으로 제품마다 녹아 있다. 하지만 잡스는 제품 출시와 관련해 시장조사나 컨설팅 의뢰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벤치마킹 대신 통찰력으로 고집스럽게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었고, 나사못 하나마저 줄이는 등 완벽한 디자인을 지향한 제품들에 전세계 사용자들은 열광했다.
잡스는 무엇보다도 세상을 바꾼 혁신가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컴퓨터의 그래픽 사용자환경(GUI)이나 멀티터치도, 엠피(MP)3와 스마트폰도, 태블릿피시도 사실은 애플이 최초로 만든 게 아니다. 하지만 이 기술은 애플 제품을 통해 비로소 대중적 상품이 되었고, 디지털 문명과 스마트 시대를 연 주인공 자리를 꿰찼다. 잡스는 이들 혁신적 제품을 통해 동시대인들의 생활방식을 변화시키는 데 그 누구보다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기술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인문적 접근을 바탕으로, 기술과 예술이 만나도록 하고 사람이 기술과 관계 맺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킨 셈이다.
미국 조지아공대 전자설계연구소의 임규태 박사는 "잡스는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던 사회에서 인간이 기술을 지배하는 사회로 탈바꿈시켰다"며 "기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제품을 통해 알려줬다"고 말했다.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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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 큰 영향을 끼친 '네번째 사과'
2011년 10월 5일(미국 현지시간) 사망한 스티브 잡스가 만든 애플은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4번째 사과'였다.
최근 인류 역사에 영향을 끼친 사과로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 화가 폴 세잔의 사과에 이어 애플의 로고인 '한입 베어먹은 모양의 사과'를 네 번째 사과로 추가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만큼 잡스와 애플이 세계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개인 컴퓨터 대중화
잡스는 1975년 최초의 소형 컴퓨터 '키트'가 등장하자 이를 완제품 개인용 컴퓨터로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5세 연상의 천재 공학도인 스티브 워즈니악을 설득해 1976년 애플컴퓨터를 창업, 애플Ⅰ을 출시한 데 이어 이듬해 개인용 완제품 컴퓨터 '애플Ⅱ'를 내놓는다. 애플Ⅱ는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초창기 개인용 컴퓨터 시장의 50%를 휩쓴다.
잡스는 이어 1984년 그래픽 사용자환경을 적용하고 마우스를 도입한 매킨토시 컴퓨터를 내놓는다. 매킨토시는 컴퓨터 사용환경에 일대 혁신을 불러온 제품으로 평가 받는다.
▲포스트PC 시대 열어
잡스는 PC시대의 개척자이자 파괴자였다. 애플이 2007년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컴퓨터로 불리는 스마트폰인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휴대전화 산업 지형을 통째로 바꿔 놓았다.
또한 2010년 초 태블릿PC인 '아이패드'를 성공적으로 출시하면서 포스트 PC시대의 본격 출발을 알렸다. PC는 결국 태블릿 PC에 밀려 올해 들어 급격하게 성장률이 축소되면서 급기야 세계 최대 PC메이커인 휴렛-패커드(HP)가 PC사업부 매각을 전제로 전격 분사하기에 이르렀다.
▲융합학문시대 앞당겨
잡스는 지난해 애플 세계개발자대회(WWDC)에서 "애플은 단순히 기술을 기반으로 한 기업이 아니다"면서 "애플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인문학에서 가져온 인간성과 기술을 연결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등 인문학과 연계한 공학을 함께 연구하는 융합학문 시대를 앞당겼다.
▲'연봉 1달러' 14년간 14달러만 받아
애플은 그에게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혁신의 도구였다.
잡스는 자신이 만든 애플에서 쫓겨난 지 11년만인 1997년 애플로 돌아왔고 이후 지난 8월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만 14년간 애플에서는 매년 1달러, 14년간 총 14달러의 연봉만 받았다. 잡스는 다른 CEO들이 탐욕스럽게 챙기는 신주를 비롯한 스톡옵션도 전혀 부여받지 않았다. 아울러 잡스는 1997년 애플로 돌아온 이후 보유하고 있던 550만주의 애플 주식 가운데 단 한 주도 매각하지 않았다.
블룸버그 추산에 따르면 9월 6일 현재 잡스의 순 자산은 적어도 67억달러(한화 약 7조9,328억원) 규모다. 잡스의 재산은 일단 아내인 로렌 파월과 네 명의 자녀에게 우선 배분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까지 잡스의 유언장이 공개되지 않아 정확한 향방은 아직 알 수 없다.
잡스가 떠난 후 후계자 팀 쿡을 중심으로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될 애플호가 향후 어떤 진로로 나아갈지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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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가 남기고 떠난 '4단계 혁신이론'
[로스앤젤레스=이균성 특파원] 스티브 잡스는 누가 뭐래도 금세기 최고의 '혁신 아이콘'이었다. 그 자리가 얼마나 컸던지, 그가 떠난 자리에서 '포스트 잡스'를 이어갈 사람을 찾아보려 해도 언뜻 떠올릴 수도 없을 지경이다.
그가 주창한 혁신을 그의 어록을 통해 분석해봤다. 어록에 따르면, 스티브 잡스의 혁신 이론은 4단계 과정을 핵심으로 삼은 듯하다.
1. 모방하고 훔쳐라
첫 번째 과정은 주변의 것을 배우고 학습하는 '모방' 혹은 '훔침'의 단계다.
그는 1996년 미국 방송 PBS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위대한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사실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했다. '뛰어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는 피카소의 유명한 격언을 인용한 것이다.
그는 결국 혁신과 창의성은 어디 특별한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주위를 열심히 탐구하고 획득하는 데서 나온다고 본다.
그는 2000년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창의성은 단순히 여러 가지 요소들을 연결하는 것을 말한다"며 "인간의 경험에 대해 폭넓게 이해할수록 더욱 훌륭한 디자인을 내놓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디자인이란 제품의 외관에서부터 포장 그리고 서비스라는 여러 단계를 통해 표현되는, 인간이 만들어낸 창조물의 근본적인 영혼"이라고 말했다.
2. 가진 것을 모두 합쳐라
두 번째로 강조되는 게 '통섭(統攝)' 과정이다.
통섭은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dward Osborne Wilson)'의 책 'Consilience'를 국내 최재천 교수가 '통섭(統攝)'으로 번역한 뒤 노무현 정부 때 유행한 말인데 그 '통섭'의 실천자가 바로 잡스였던 것이다.
잡스는 지난 2일 아이패드2를 발표하면서 맺음말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애플의 DNA는 '기술만으로는 (좋은 제품을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애플의 기술은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해주는) 인문학과 결합했다." 기술은 사람을 위해 복무해야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고, 이게 제대로 되려면 인문학적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잡스는 이 점에서 폴라로이드를 만든 발명가이자 물리학자, 에드윈 H. 랜드(Edwin H.Land) 박사를 사숙(私淑)했다고 할 수 있다.
잡스는 1999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폴라로이드가 예술과 과학의 교차점에 서길 바란다.'는 랜드 박사의 말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기술과 인문학의 결합을 그토록 강조한 것이다.
3. 다르게 생각해라
이미 존재하는 모든 요소들을 '모방'하고 '훔침'으로써 세상에 대한 폭넓은 통섭을 바탕으로 변화의 길목에 미리 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게 세 번째다.
잡스는 2007년 맥월드 행사 때 이런 자신의 노력을 캐나다의 전설적인 아이스하키 영웅인 웨인 그레츠키(Wayne Gretzky)의 말을 인용해 대신했다. 그레츠키는 "나는 퍽(puck)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 퍽이 갈 곳으로 스케이트를 타고 간다."라는 말로 잡스에게 영감을 줬다.
애플이 1984년 매킨토시를 만들어냄으로써 개인용 컴퓨터(PC) 시장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게 이를 테면 퍽이 갈 방향이었으며, 2001년에 내놓은 아이팟과 아이튠스, 2007년에 내놓은 아이폰, 2010년에 내놓은 아이패드 등과 같은 제품 또한 퍽이 갈 길목에 미리 내놓은 제품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 볼 건 이들 제품 모두 이미 존재했던 것들에 대한 '모방'과 '훔침'을 통해 세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로 다시 변주됐다는 점이다.
4. 쉽게 단순화 해라
네 번 째 요소는 '단순화'라고 할 수 있다.
스티브 잡스는 '직감 혹은 직관(intuition)'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통섭이 난해해지면 일반인으로써는 별로 쓸 모가 없어진다. 기술과 인문학을 결합하되 그것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해야 한다. 세상이 발전할수록 기술과 사람의 일은 복잡해지게 돼 있다. 이를 섞어서 통찰하면서도 직감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중간에서 그 제품을 만들어내는 자의 사명이라는 게 스티브 잡스의 생각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선(禪)에 심취했다는 스티브 잡스는 1998년 비즈니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단순함은 복잡함보다 어렵다. 생각을 깔끔하고 단순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신의 상품을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3분 안에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른바 '엘리베이터 브리핑(Elevator briefing)'은 스티브 잡스에게는 단순한 마케팅 이론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상품을 만들어 파는 기업가의 철학으로 생각된다.
/로스앤젤레스(미국)=이균성 특파원 gslee@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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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디지털혁명 주인공' 10가지
[안희권기자]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 애플 전 최고경영자(CEO)가 1975년 사업을 시작한 이래 10가지 핵심 제품을 선보이며 세상에 디지털 혁명을 일으켰다. 그 주인공은 아래와 같다.
◆세계 최초 개인용 컴퓨터 '애플1'(1976년)
애플1은 1976년 애플이 최초로 선보인 개인용 컴퓨터다. 스티브 위즈니악이 설계했고, 친구인 잡스가 판매를 담당하기로 했다. 애플1은 1976년 7월 666.66달러에 판매를 시작했다.
◆개인용 컴퓨터시대를 연 '애플2'(1977년)
애플2는 성공적으로 대량 생산한 컴퓨터 제품 중 하나로, 애플1에 이어 스티브위즈니악이 설계를 담당했다. 애플2 시리즈는 인기를 누리며 1993년 11월까지 생산됐다.
◆GUI 환경을 최초 도입한 '리사'(1983년)
제록스 연구소를 방문해 마우스를 이용한 그래픽사용자환경(GUI)의 가능성을 깨닫은 스티브 잡스가 이 기술을 최초로 도입해 개발된 제품이 리사다. 하지만 높은 가격 때문에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애플 간판 제품 '매킨토시'(1984년)
매킨토시는 높은 가격 때문에 상업화에 실패한 리사의 사례를 거울삼아 가격을 내리고 보다 처리속도를 높인 제품이다. 매킨토시는 레이저 프린팅 기능을 지원하면서 출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게 활용됐다.
◆잡스의 재도전 '넥스트'(1989년)
잡스가 애플을 떠난 후에 강력한 워크스테이션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해 만든 플랫폼. 많은 수를 판매하진 못했지만 주목을 받은 제품이다. 세계 최초로 웹 브라우저를 지원했으며, 애플 맥의 핵심 운용체제인 맥 OS X의 토대된 플랫폼이다. 아이폰의 iOS도 이 플랫폼을 토대로 만들어 졌다.
◆디자인과 만났다 '아이맥'(1998년)
아이맥은 잡스가 복귀한 후 선보인 새로운 유형의 맥컴퓨터. 파란색의 투명 플라스틱 소재를 활용해 모니터와 컴퓨터 본체를 일체화 한 것이 특징이다. 잡스는 아이맥 출시 이후 컴퓨터를 경량화 하는 작업을 본격화 했다.
◆휴대형 단말기 시장에 출사표 '아이팟'(2001년)
애플은 후발주자로 휴대형 뮤직플레이어 시장에 진출했으나 불과 2~3년만에 관련 시장을 재패했다. 애플은 아이팟의 성공을 계기로 아이튠스 음악 스토어와 아이폰을 잇따라 출시했다.
◆온라인음악시장을 평정한 '아이튠스 스토어'(2003년)
애플은 아이팟 성공을 계기로 디지털음원을 거래할 수 있는 온라인상점 '아이튠스 스토어'를 선보였다. 아이튠스 스토어는 거대 음반사 음원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어 이용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으며, 2008년 미국 최대 음반 판매점으로 등극했다.
◆통신시장을 뒤흔든 스마트폰 '아이폰'(2007년)
매킨토시의 장점을 휴대폰에 도입한 아이폰은 출시와 동시에 휴대폰 시장을 뒤흔들었다. 멀티터치기반의 사용자 환경은 휴대폰의 새로운 입력방식으로 자리매김했다. 애플은 아이폰을 통해 매년 최고의 수익을 올리고 있으며,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태블릿PC 시대를 연 '아이패드'(2010년)
아이패드가 등장하기 전에는 애플을 포함해 수십개의 기업들이 태블릿PC 시장에서 도전했다가 실패를 맛봤다. 하지만 아이패드 등장 이후 불가능할 것 같았던 태블릿PC 시장이 본격화 되고 있다. 아이패드는 태블릿PC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으며, 노트북PC시장까지 위협하고 있다.
/안희권기자 argo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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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도 실패했다…실패작 7選
(뉴욕 AP=연합뉴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신제품 디자인 작업 때 기존의 통념을 깨고 한계에 도전하는 아이디어를 내놓곤 했다.
한계에 도전한 잡스의 아이디어는 대박으로 이어진 경우도 있지만, 참담한 실패로 끝난 경우도 적지 않다.
잡스의 주도로 탄생한 제품 가운데 상업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실패로 끝난 제품 7건을 소개한다.
1. 애플Ⅲ (1981년 출시) : 큰 인기를 끌었던 애플Ⅱ의 후속작으로 업무용으로 출시됐다. 그러나 하드웨어의 신뢰성이 떨어져 같은 해 등장한 IBM의 PC에 시장의 주도권을 잃고 말았으며 이후 컴퓨터 시장은 급속하게 PC 중심으로 확대됐다.
2. 리사(Lisa·1983년 출시) : 그래픽 사용자 환경에 맞춰 출시된 첫 제품으로 출시 당시 가격이 9천995달러에 달했다. 비싼 가격 탓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1년 후 등장한 저가의 매킨토시에 의해 완전히 밀려났다.
3. 넥스트 컴퓨터(NeXT Computer·1989년 출시) : 잡스가 애플에서 퇴출당하고 나서 만든 벤처회사에서 내놓은 제품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시대를 앞서간 제품이었다. 그러나 애플Ⅲ, 리사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고가여서 시장에 안착하는 데 실패했다.
4. 퍽 마우스(Puck Mouse·1998년 출시) : 96년 잡스가 애플에 복귀한 후 내놓은 야심작인 아이맥(iMac)은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아이맥에 딸린 작고 둥근 모양의 마우스는 크기가 너무 작은데다 커서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워 사용에 불편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5. 큐브(Cube·2000년 출시) : 깔끔한 플라스틱 육면체를 외관으로 한 소형 데스크톱 컴퓨터인 큐브는 각종 디자인상을 휩쓸었으나 비싼 가격 때문에 매장에서는 외면당했다. 또 기능적인 측면에서 여타 맥 제품과 비교하면 장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애플의 디자인은 우상이 됐지만, 당시에는 오로지 디자인 때문에 높은 가격을 낼 고객들이 별로 없었다. 큐브의 디자인은 이후 맥 미니(Mac Mini)로 명맥이 이어졌지만 튀지 않는 무난한 디자인으로 다듬어진 후에야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6. 아이튠스 폰(iTunes phone·2005년 출시) : 애플이 휴대전화 사업에 처음 뛰어들 때 내놓은 제품이 아이폰이 아니라는 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애플이 모토로라와 제휴해 2005년 ROKR라는 이름으로 출시한 이 제품은 전화기로서는 괜찮은 제품이었지만 뮤직 플레이어로서는 아이팟에 밀렸다.
노래를 100곡만 저장할 수 있었고 컴퓨터로 음악을 전송하는데 시간이 한참 걸렸으며 휴대전화 네트워크를 통해 음악을 내려받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단점으로 꼽혔다.
7. 애플TV(2007년 출시) : 안방에서 TV와 맥 컴퓨터에 연결해 영화와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한 이 제품은 설치와 사용이 불편한 것이 단점이었다. 아이튠스를 통해 구입한 영화를 고화질TV를 통해 재생하면 흐릿한 영상으로 봐야 하는 것도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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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우리에게 남긴 명언들
그는 떠났지만 팬들 가슴에 영원히 남을 그의 대표적인 명언들을 담아 보았다.
◆내가 계속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내가 하는 일을 사랑했기 때문이라 확신합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는 일을 찾으셔야 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야 하듯 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일에 관하여)
◆혁신은 연구 개발 자금을 얼마나 갖고 있냐와 상관없습니다. 애플이 매킨토시를 출시했을 때 IBM은 연구 개발에 최소 100배 이상의 비용을 쏟고 있었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인력을 갖고 있느냐, 어떤 방향으로 가느냐, 결과가 얼마나 나오느냐에 관한 문제입니다.(혁신에 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디자인이란 겉치장이고 인테리어는 장식입니다. 하지만 내게 디자인이란 그것들과 거리가 멉니다.디자인은 인간이 만들어낸 창조물의 본질적 영혼으로 제품과 서비스를 겹겹이 포장하며 드러나는 것입니다.(디자인에 관하여)
◆가끔은 혁신을 추구하다 실수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빨리 인정하고 다른 혁신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최선입니다.(실패에 관하여)
◆우리가 이룬 것만큼, 이루지 못한 것도 자랑스럽습니다.(자신감에 관하여)
◆나머지 인생을 설탕물이나 팔면서 보내고 싶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꿔놓을 기회를 갖고 싶습니까? (펩시콜라 사장을 애플에 영입하기 위해 한 말)
○.."기술만으로 애플의 DNA를 만족시킬 수 없다. 기술은 인문학과 결합돼야 하고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휴머니티(인간성)를 반영해야 한다."(2011년 3월 아이패드2 발표 현장)
○.."혁신은 우리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일,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다고 생각하는 1000가지 일에 대해 '노(No)'라고 말하는 데서 나온다."(2004년 10월 비즈니스위크)
○.."여러분이 하는 일에 대해 진정으로 만족하는 유일한 방법은 위대한 일이라고 믿는 것이다. 위대한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 '오늘이 내 인생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는 일을 할 것인가'의 질문을 던졌을 때 '노(no)'라는 답이 나온다면 변화가 필요하다는 증거다. 아직 만족하는 일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일을 발견할 때까지 찾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또 타인의 의견 때문에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진심의 목소리를 지우지 말라. 자신의 직감을 믿는 용기를 가져라." (2005년 6월 스탠퍼드대학 졸업식 연설)
○.. "혁신은 얼마나 많은 연구 개발비를 투자하느냐와 상관없다. 혁신은 돈이 문제가 아니다. 혁신은 당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당신이 어떤 리더십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그들로부터 이끌어 내느냐의 문제다." (1998년 11월 포천 인터뷰)
○.. "우리가 사업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별로 없다. 이제 팀을 만들어 움직여야 한다. 개인은 팀의 업무에 대해 성실함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팀이 해낼 수 있는 최고의 일을 하도록 해야 한다." (1995년 스미스소니언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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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스탠포드대학교 졸업식 축사 (2005년6월12일)
오늘 저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의 한 곳을 졸업하면서 새 출발을 하는 여러분들과 함께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번이 제가 대학 졸업식이라는 곳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경우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제 인생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고 그저 세 가지의 이야기입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점(點)을 잇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리드 대학이라는 곳을 첫 6개월 다닌 후 그만 두었습니다. 그 후 18개월 동안은 비정규 청강생으로 머물렀고 그 후 완전히 자퇴를 했습니다. 제가 왜 대학을 그만두었을까요?
이야기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됩니다. 제 생모는 젊은 미혼의 대학생이었는데, 저를 낳으면 다른 사람에게 입양을 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생모는 제가 반드시 대학을 졸업한 부부에게 입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면 바로 어떤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기로 되어있었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태어났을 때 절 입양키로 한 부부는 마음을 바꿔, 자신들은 여자아이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의 양부모님은 한밤중에 "우리가 예기치 않은 사내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아이를 원하느냐"는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흔쾌히 입양을 수락하셨습니다.
저의 생모는 나중에야 양어머니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의 생모는 이런 이유로 최종 입양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다가 몇 달 후 양부모님이 저를 나중에 대학에 보낼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서야 마음을 바꿨습니다.
17년이 지난 후 저는 정말 대학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당시에 스탠포드와 거의 맞먹는 수준의 학비가 드는 대학을 선택했고, 평범한 노동자였던 저의 양부모님은 저축한 모든 돈을 제 대학등록금에 써야 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난 후 저는 그만한 돈을 쓰는 데 대한 가치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저의 삶에서 무엇을 하길 원하는지 알지 못했고, 대학이 그것을 아는 데 어떤 도움을 줄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저의 부모님은 전 인생을 통해 저축해놓은 모든 돈을 학비로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당시 그런 결정은 다소 두렵기도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것이 제가 지금까지 한 결정 중에 가장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학교를 그만두는 그 순간, 저는 흥미가 없었던 필수과목을 들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관심 있는 다른 과목들을 청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다지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기숙사에 방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 방의 바닥에서 잠을 잤습니다. 음식을 사기 위해 콜라병을 반납해서 5센트씩 모았고, 해어 크리슈나 사원에서 일주일에 한번 주는 식사를 얻어먹기 위해 일요일 밤마다 7마일을 걸어가곤 했습니다. 저는 그걸 좋아했습니다. 제가 호기심과 직관을 따라서 한 일들은 나중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큰 가치로 나타났습니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다녔던 리드대학은 그 당시 미국에서 최고의 서체 교육 기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캠퍼스 전체를 통해 모든 포스터, 모든 표지물들은 손으로 그려진 아름다운 손글씨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정규과목들을 더이상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글자체들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배워 보려고 서체과목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세리프나 산세리프 활자체를 배웠고, 무엇이 훌륭한 활자체를 만드는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이 알아내지 못하는,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예술적인 미묘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에 매료되었습니다.
당시 저에겐 이런 모든 것이 제 삶에 실제로 응용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최초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만들 때 그 모든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맥 컴퓨터는 아름다운 글자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되었습니다. 제가 만일 대학의 그 과목을 듣지 않았다면 맥 컴퓨터는 결코 다양한 서체를 가진 컴퓨터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원도즈는 맥 컴퓨터를 단지 베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맥 컴퓨터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떤 개인용 컴퓨터도 그런 아름다운 서체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만일 정규과목을 그만두지 않았고, 서체과목에 등록하지 않았더라면, 개인용 컴퓨터는 지금과 같은 놀라운 서체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잇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후 과거를 되돌아 볼 때 그것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이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점을 이을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지금 잇는 점들이 미래의 어떤 시점에 서로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내면, 운명, 인생, 카르마, 그 무엇이든지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접근법은 저를 결코 낙담시키지 않았고, 제 삶의 모든 변화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저의 두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인생의 이른 시기에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한 행운아였습니다. 우즈(스티브 우즈니액, 애플 공동창업자)와 저는 애플을 우리 부모님의 차고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스무살이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10년이 지난 후 애플은, 우리 둘만의 차고에서 20억 달러에다 4000명의 직원을 가진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해고를 당할 수 있냐구요?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잘 맞는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첫해는 그럭저럭 잘 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 후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관점에 차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결국 내부적으로 분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회사 이사회는 그를 지지했고, 저는 서른 살이 된 해에 그렇게 쫓겨났습니다. 성인이 되어 제가 초점을 맞춰왔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리고, 저는 너무나 비참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몇 달 동안 저는 무엇을 할지 몰랐습니다.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 저는 데이비드 팩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 했습니다. 저는 공식적으로 실패한 사람이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 맘속에 무언가가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제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을 꺾지 못했습니다. 저는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저의 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새롭게 출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는 전혀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된 일은 저에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일 중 최고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제가 성공의 중압감을 벗어나 초심자의 가벼운 마음을 되찾게 해줬고,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해줬습니다.
이후 5년 동안 저는 NeXT, 그리고 Pixar라는 이름의 다른 회사를 만들었고, 지금의 제 처가 된 여성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로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만들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회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놀랍게도 애플은 넥스트를 사들였고 저는 애플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넥스트에서 개발한 기술은 애플의 현재 르네상스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또한 로렌과 저는 함께 한 가족을 만들었습니다.
저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중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것은 쓰디쓴 약이었지만,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인생이란 때로 여러분들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신념을 잃지 말기 바랍니다. 저를 이끌어간 유일한 힘은, 제가 하는 일을 사랑했다는 것에서부터 나왔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에서도 같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은 인생의 많은 부분을 채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만족하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 스스로 훌륭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일을 하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 계속해서 찾으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것을 발견할 때 여러분은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훌륭한 관계들처럼, 그것은 해가 지나면서 점점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 찾으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세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매일을 삶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대부분 옳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저는 그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이후 33년 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려는 것을 하게 될까?" 그리고 여러 날 동안 그 답이 '아니오'라고 나온다면, 저는 어떤 것을 바꿔야 한다고 깨달았습니다.
제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제가 인생에서 큰 결정들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 가장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모든 외부의 기대들, 자부심, 좌절과 실패의 두려움, 그런 것들은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을 남기게 됩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함정을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약 1년 전 저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30분에 검사를 받았는데, 췌장에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췌장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이것이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종류의 암이라면서 제가 길어봐야 3개월에서 6개월밖에 살수 없다고 했습니다. 의사는 저에게 집으로 가서 주변을 정리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것은 내 아이들에게 앞으로 10년동안 해줘야 하는 말을 단 몇 달 안에 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임종 시 가족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모든 것을 정리하란 말이었고 작별인사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루 종일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날 저녁 늦게 저는 목구멍을 통해 내시경을 넣는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세포를 췌장에서 떼어내 조사를 했습니다.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나중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 밝혀져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건강해졌습니다.
이것이 제가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간 경우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 몇 십 년간은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다는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 위해 죽기를 원하지는 않죠. 하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해 갈 수 없죠.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니까요. 죽음은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않은 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너무나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합니다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에 맞춰 사는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래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그는 자신의 모든 걸 이 책에 불어넣었습니다. 그 책이 나온 게 1960년대로, 그 당시에는 개인용 컴퓨터도 PC 출판도 없었기 때문에, 그 책은 타자기와 가위, 폴라로이드 사진들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종이책 형태의 구글 같은 것이었는데, 구글이 나타나기 35년 전의 일입니다.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이 책을 여러 번 개정했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냈습니다. 그것이 197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바로 제가 여러분의 나이 때입니다. 그 최종판의 뒷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나아가라." (Stay Hungry. Stay Foolish)
영어 원문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Jobs says
This is a prepared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delivered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on June 12, 2005.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Stay Hungry. Stay Foolish.
Thank you all very m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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