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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表

이태석 신부 (울지마 톤즈)

 

 

 

신부가 아니어도 의술로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데,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아프리카까지 갔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내 삶에 영향을 준 아름다운 향기가 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바친 슈바이처 박사,

어릴 때 집 근처 고아원에서 본 신부님과 수녀님들의 헌신적인 삶,

마지막으로 10남매를 위해 평생을 희생하신 어머니의 고귀한 삶,

이것이 내 마음을 움직인 아름다운 향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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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이태석 신부님 작사, 작곡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느냐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 말씀 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 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이태석 신부 님은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부산의 달동네에서 홀어머니의 삯바느질에 실린 사랑을 느끼며 보며 자랐다고 한다.

 

어렵게 공부하여 의대를 졸업하고 앞길이 탄탄한 의사로 출발하게 되지만

자신의 숙명은 신부사제의 길이라 여기고 부귀영화를 던져버리고 서품을 받는다.

그리고 가장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 사는 아프리카 수단의 빈곤한 마을 '톤즈'로 자원했다.

 

 

거기서 10년의 세월을 톤즈인으로 동화되어 살며

몸이 아픈 자들을 진료하고, 맘이 아픈자들을 위로하며,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설립하고

브라스밴드를 구성하여 어린이들에게 꿈을 키워준다.

한센인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준다.

 

 

 

영화를 보며 그 짧은 세월에 많은 것을 이룬 그의 열정과 헌신을 느꼈다.

스크린 내내 함박웃음을 잃지 않는 그의 모습이 감동스럽다.

한 사람의 헌신과 사랑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과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게 감격스럽다.

 

대장암으로 투병하며 마지막 삶을 살아가면서도 의연함을 잃지않는

그리고, 스러져가는 육신보다 멀리 톤즈의 사람들을 걱정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안쓰럽기만 하다.

 

또한, 그런 아들을 눈물로 키운 어머니의 희생을 보며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9남매를 삯바느질로 홀로 키워내는 엄마를 보며

자녀들도 헌신과 사랑이 자연스러운 감성과 인성을 키웠나 보다.

2명이 신부로, 1명은 수녀의 길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한 사람의 헌신과 희생을 통하여

수단의 한 마을 사람들이 희망과 행복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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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87년도에 의대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구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인
아프리카 수단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찾아간 곳은 남쪽의 마을 <톤즈>였습니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 오랫동안 내전을 해온
아프리카 수단은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지역입니다.

수단의 톤즈 역시 그랬습니다.
상대를 향한 분노, 증오,
거기다가 덮쳐오는 가난과 질병.
목숨걸고 가족과 소를 지키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



덕분에 그들은
가족이 아파도, 힘들어도,
누가 죽어도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열악하고 처참한 현실에서 살다보니
마음이 메말라 버린 것입니다.

남자는 톤즈 사람들을 위해
사람들을 치료하고 병원을 만들고
교육기관을 설립했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 버려졌던
한센병 환자들을 보듬어주고
아이들을 위해 악기를 가르쳐
브라스밴드를 만들었습니다.



웃음과 즐거움이 사치이던 톤즈마을은
한 남자 덕분에
점점 사람사는 공간처럼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남자는 휴가차 한국에 돌아왔다가
자신이 말기 암 환자라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결국 그리운 수단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고 맙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 톤즈 사람들.
강인함과 용맹함만을 믿기에
우는 것이 수치인 사람들.
가족이 죽어도 울지 않던 그들이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마흔 여덟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쳤지만
메마른 땅에 단비가 되어주던 한 남자.
그의 이름은 이태석 신부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인 수단은 1956년 독립 직후부터 집권층인 소수의 아랍계와 피지배층인 다수의 원주민 사이의 끝없는 내전으로 모든 것이 황폐해져 있는 상태다. 1980년대 남부에서 석유가 발견된 이후 이를 차지하기 위한 내전은 더 격화되었다. 특히 반군이 점령하고 있는 남부 수단은 절망의 황무지라고 불리울 만큼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다. 어린 소년들은 소년병이라는 명목하에 군대에서 착취당하고 있으며, 느닺없이 시작되는 전쟁의 불안감과 더욱 심해지는 폭력성으로 국민들은 두려움으로 가득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또한 악성 말라리아와 콜레라등의 전염병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다. 강한 햇빛과 습기 많은 우기를 가진 자연환경과 질 낮은 위생상태, 기본적인 식량부족등으로 인해 상상을 초월하게 빠르게 퍼진 전염병은 전쟁만큼이나 톤즈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 지옥같은 곳에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준 한 사람이 있었다.

이태석 신부는 2001년 로마 교황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남부 수단을 자원해 부임했다. 그는 인제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까지 마친 의사였으나, 세상의 가장 가난한 곳에서 의술을 펼치고 싶다는 어린시절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뒤늦게 신학대학에 진학했고 신부가 되자마자 톤즈로 향했다. 병원이 생겼다는 소문을 들은 톤즈사람들은 며칠 밤을 새며 걸어와 치료를 받았고, 그런 환자들을 돌려보낼 수 없었던 이태석 신부는 잠을 줄여가면서 환자를 맞았다.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치료를 하는 신부의 투혼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병원은 나날이 많은 환자들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이태석 신부는 병원까지 오지 못하는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높은 온도에 약한 백신을 아이스박스에 넣어가 직접 환자를 찾아가 접종해 주었다. 백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냉장고를 사용하기 위해 전기가 없는 톤즈의 건물 지붕에 태양열 집열기를 설치하여 전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그는 환자들의 아픔을 좀 더 잘 듣기위해 그들의 말인 딩카어도 열심히 배웠다. 모든 것을 혼자서 꾸려가야 했던 이태석 신부의 진료는 그렇게 밤을 세워가며 계속 되었다. 병과 싸울 힘조차 없었던 사람들이 그의 사랑과 노력으로 인해 귀중한 생명을 이어가게 되었다.

 

병원이 자리를 잡아가자 이태석 신부는 톤즈에서 이루고 싶은 또하나의 꿈을 펼쳐놓기 시작한다. 소년병으로 끌려가는 아이들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황 속에서 할 일이 없는 아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학교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학교가 없어서 배우지 못하고 그로 인해 가난이 대물림되고 있는 톤즈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바꿔보기 위해 그는 예수님의 사랑이 깃들은 학교를 만들기로 한다. 병원과 마찬가지로 톤즈사람들과 함께 만든 학교는 고등학교 과정까지 한 교정에 있는 톤즈의 유일한 학교로 완성되었다. 이태석 신부는 직접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고, 케냐에서 교사 자격증이 있는 교사들을 선발해 데려와 학생들을 가르쳤다. 톤즈 돈보스꼬 초,중,고등학교(12년 과정)는 남부 수단에서 가장 실력있는 학교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보통 다른 학교는 오전에 간단한 수업읋 하고 선생님이 없을 경우에는 수업을 하지 못하기도 하면서 오전 12시면 모든 수업이 끝나는데, 돈보스꼬 초중고등학교는 항상 선생님들이 수업을 하고 있고, 고등학교 수업은 오후 3시까지 알찬 수업으로 짜여져 있어 많은 아이들이 오고 싶어하는 학교가 되었다. 수업의 열기 또한 대단하여 고등학교 3학년 수업의 경우 한 교실에서 비좁게 모여 앉아 수업을 들었다. 학교 근처에는 기숙사도 만들어서 집이 먼 아이들이 숙식을 해결하며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배려했다. 오랜 전쟁으로 몸과 마음이 부서진 톤즈의 아이들은 이태석 신부의 꿈이 담긴 학교에서 드디어 자신의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고 사랑을 배우게 되었다.

 

이태석 신부는 '문둥이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다미안 신부를 닮겠다는 어린 시절의 다짐을 잊지 않고 톤즈의 한센인들의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어루만졌다. 톤즈 중심가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인적드문 곳에 위치한 한센인 마을은 그가 찾기 전까지 초가집에 지하수까지 없는 마을이었다. 그는 그곳에 벽돌집을 짓고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펌프시설을 만들었다. 그는 톤즈에서 단 하나뿐인 엠불런스를 타고 한센인 마을을 찾았다. 차 소리가 나면 나무 막대기를 집고 손과 다리가 성하지 않은 어른과 아이들이 몰려나온다. 이태석 신부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주고 직접 고름을 짜내주고 붕대를 감아주며 발에 깊은 상처를 입은 환자들을 위해 직접 만든 신발을 신겼다. 처음으로 한센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을 느낀 그들에게 이태석 신부는 사랑 그 자체였다.

 

톤즈에서 내전은 끝났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다. 여전히 군인들이 점령하고 있는 그 곳의 아침은 군대의 구호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전쟁과 가난에 찌든 아이들의 마음이 음악으로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랐던 이태석 신부는 그가 오래도록 꿈꾸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 그것은 바로 35인조 브라스밴드를 만드는 일이었다. 모든 악기를 자신이 먼저 스스로 배워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악보를 만들고 한국 살레시오에서 보내준 단복을 입혔다. 총 대신 악기를 든 톤즈의 아이들은 곧 남부 수단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브라스 밴드는 정부 행사에도 초청을 받았다. 남부 수단 대통령이 개최한 리셉션에서 연주를 선보인 브라스 밴드는 정부 공무원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 내었다. 아이들은 지금도 새벽이면 모여서 연습을 한다. 이태석 신부가 만들어준 악보를 보고 선배들이 후배를 가르치며 밴드를 꾸려가고 있다. 아무런 꿈도 가질 수 없었던 아이들에게 브라스 밴드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이태석 신부가 없는 지금, 그들은 그의 사진을 보자마자 너 나 할 것 없이 사진에 입을 맞추며 애절한 눈물을 쏟아냈다. 자신들을 환자가 아닌 인간으로 대해준 그를 향한 그리움은 안타까운 절규 그 자체였다. 그들은 이태석 신부를 '영원한 아버지'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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