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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表

박노해

 

 

나쁜의 뿌리는 나뿐 … 좋은의 어원은 주는

[중앙일보] 입력 2014.02.05 00:01 / 수정 2014.02.05 01:49

『노동의 새벽』 그 후 30년
박노해 시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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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심장의 피를 따라서 붉은 포도주 한 잔 건네고 싶은 심정입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메시지는 절박했다. 시인 박노해(57·본명 박기평)가 이 시대 청춘에게 던지는 한마디다. 30년 전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시집 『노동의 새벽』에서 당시 ‘공돌이 공순이’에게 차가운 소주 한 잔을 권했던 그다.

 “그 시대는 모두 뜨거웠다. 그들의 울분을 식혀주려 했다. 그런데 지금 젊은이들은 너무 무기력하다. 삶의 혁명을 권하고 싶다. 혁명은 옛것을 파괴하고 새것을 만드는 게 아니다. 영어 ‘레볼루션(Revolution)’이 그렇다. 본래 자신을 찾는 것이다. 첫사랑의 순수함 같은 것 말이다.”

젊은이여, 당신의 삶을 혁명하라

아시아 각국의 전통공동체에서 현대문명의 대안을 찾고 있는 박노해 시인. 그는 “남들이 변절자라 하든, 빨갱이라 하든 나의 길을 걸어왔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박씨가 오랜 묵언(默言) 끝에 폭포수 같은 말을 쏟아냈다. 설 연휴 직후인 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만난 자리에서다. 그는 5일부터 다음 달 3일까지 같은 장소에서 사진전 ‘다른 길’을 연다. 인도네시아·파키스탄·라오스·미얀마·인도·티베트의 토박이 마을을 돌며 그곳의 땅과 사람,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현장을 포착한 흑백사진 120여 장을 내놓았다. 한 폭의 정지된 풍경화마냥 자연에 순응하고 서로 우애 있게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경쟁문화에서 벗어나는 길을 탐색하고 있다. 같은 제목의 사진에세이집도 함께 냈다. 1998년 출소 이후 ‘사회혁명가’에서 ‘문명운동가’로 돌아선 그의 육성을 들어봤다. - 설 연휴 전시 준비로 바빴겠다.

 “6월께 낼 책 원고도 다듬었다. 경기도 시흥의 어머니께 인사도 갔다. 『노동의 새벽』을 썼던 15평짜리 연립이다. 어머니께선 35년째 그곳에 살고 계신다. 신부인 형과 수녀인 여동생도 함께했다.”

 -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나.

 “부농의 막내딸이셨다. 가난한 남편을 만나 고생을 많이 하셨지만 평생 경우가 바르셨다.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호래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집안 댓돌에 아버지께서 신으시던 하얀 고무신을 항상 올려놓으셨던 분이다. 평생을 하루 네 시간 이상 기도하셨다. 정의와 선에 대한 믿음은 수도자보다 더하셨다.”

‘잘 살아보세’ vs ‘고르게 사세’ 끝

 - 세 번째 사진전이다. (박씨는 4년 전 아프리카·중동·중남미 등 빈국과 분쟁 지역에서 찍은 흑백사진을 모아 두 차례 사진전을 열었다.)

 “91년 사형을 구형받을 때 사회주의 붕괴 소식을 들었다. ‘한 시대는 끝나고, 나는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잘 살아보세’(자본주의)와 ‘고르게 잘 살아보세’(사회주의)의 대립구도는 끝났다고 판단했다. 분단의 섬에, 지극히 통제된 환경에 갇혀 지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다시 살아 나가면 전 세계 문제현장을 밟아보며 새로운 대안을 찾아보자고, 그때까진 침묵하겠다고 결심했다.”

 - 그래서 입을 열게 됐나.

 “내가 살아남은 건 87년 서울대 박종철군이 고문당하다 죽은 덕분이다. 살아남은 자의 책무를 절감했다. 출소 이후 내 자신을 국경 너머, 경계 밖으로 추방시켰다. 만년필과 낡은 카메라를 들고 유랑에 나섰다. 인류를 먹여 살릴 한 뼘의 대지를 일구는 사람들을 만났다.”

 - 따로 사진을 배우지 않았는데.

 “연출 하나 없이 찍었다. 특별히 구도도 잡지 않았다. 모두 수동 라이카 카메라로 찍었다. 카메라 구석구석을 알게 돼 고장이 나도 고칠 수 있다. 디지털카메라였다면 열 번쯤 바꿔야 했을 것이다.”

민주화 이뤘지만 인간에 예의 잃어

 - 굳이 외국까지 갈 필요가 있었나. 우리 안의 문제도 산적한데.

 “알고 있다. 양극화를 해소해야 하고, 약자의 인권도 옹호해야 한다. 그런데 이제 우리 사회에 가난한 사람은 없다.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여느 시골집 옷장에도 안 입는 옷이 쌓여 있다. 소비문명의, 석유경제의 정점에 서 있는 거다. 중국·인도 등의 모든 사람이 우리의 최하위 10%처럼 산다면 지구가 열 개라도 자원이 모자랄 것이다.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생각한다.”

 - 그래서 ‘다른 길’인가. 옛날로 돌아가자는 건 시대착오 아닌가.

 “그렇지 않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에겐 품위와 품격이 있었다. 정갈한 문화가 있었다. 노동자 시절 전국 8도에 친구가 있었는데, 어디를 가도 이불 홑청 새로 빨아 풀을 먹여주셨던 어머니·할머니가 계셨다. 우리말로 ‘찹찹하다’(가깝고 살뜰하다)고 한다. 80년대 들어 민주화를 이뤘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와 도리를 잃게 됐다. 이권다툼으로 전락한 진보 진영에서 빠진 것도 이런 거다. ‘앞선 과거’를 회복해 새 문명을 일으키자는 뜻이다.”

 -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우리 시대 지성 한 분이 ‘착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한 적이 있다. 말도 안 된다. 착한 사람은 그 자체로 잘 산 것이다. ‘잘 사는 사회’가 ‘돈 잘 버는’ 사회인가. 우리는 탐욕의 포퓰리즘에 빠졌다. 요즘 ‘대박 대박’ 하는데 대박은 누군가의 ‘쪽박’이다. ‘나쁜’ 꿈이다. ‘나쁜’의 어원은 ‘나뿐’이다. 불교의 아상(我相)이다. 깨뜨려야 한다. 반대로 ‘좋은’의 뿌리는 ‘주는’이다. 대박 대신 ‘소박’을 되찾자.”

 얘기는 ‘지금, 여기’로 모아졌다. 100만 부 가까이 팔린 『노동의 새벽』은 87년 민주화운동의 작은 불씨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87년 민주화의 산물인 대통령 5년 단임제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진 요즘이다.

 - 여야 모두 87년 체제 극복을 말하고 있다.

 “386세대가 주류로 진입하면서 예전의 운동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거나 출세를 하는 수단이 됐다. 사회운동이 스펙을 쌓고 투자를 하는 것인가. 진보든 보수든, 좌든 우든 모두 낡은 진영논리에 갇혔다. 모든 게 돈(화폐)으로 귀결된다. 이념은 껍데기다. 강을 건너는 뗏목에 불과하다. 강(민주화)을 건넜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의 근원을 고민해야 한다.”

진영논리 … 이념은 껍데기일 뿐

 - 요즘 국제정세가 100년 전을 닮았다는 분석이 많다.

 “이제 우리는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아니다. 중국이 고래라면 우리는 작지만 날렵한, 머리 좋은 고래다. 경제도, 정치도 강한 국가로 올라섰다. 다만 그에 걸맞은 책임은 다하고 있지 않다. 중국은 국가독점체제다. 유연성이 부족하다. 우경화로 돌아선 일본도 카드를 거의 다 쓴 상태다. 이럴 때 우리가 새로운 생활양식을 제시해야 한다.”

 - 북한 문제가 남아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의 ‘대박’ 표현이 천박했지만 통일이 남북 주변국 모두에 득이 된다는 인식은 긍정적으로 본다. 답은 남북 교류와 화해밖에 없다.”

 - 한국사의 대전환을 꼽는다면.

 “올해가 동학 120년이다. 사람들은 실패한 사건으로 본다. 아니다. 인류사의 유례없는 혁명이었다. 시천주(侍天主), 사람이 하늘이라고 했다. 양반과 노비, 기존의 신분질서를 뿌리에서부터 뒤흔들었다.”

공돌이·촌놈 … 상처가 내 경쟁력

 - 이 시대 청년들을 걱정한다.

 “내가 지금까지 온 것은 약점 때문이다. 촌놈이고, 상고(선린상고 야간) 출신이고, 공돌이였다. 그게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됐다. 상처가 최고의 ‘경쟁력’이 된 거다. 가장 힘 센 것은 역시 슬픔인 것 같다. 삶은 기적이다. 우리는 인생을 선물로 받았다. 일자리가 없다고, 돈이 적다고 자신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면 한다. 만약 돈을 벌게 되면 그 반대로 행동할 것인가.”

 - 원인이 무엇일까.

 “부모들이 입버릇처럼 ‘나처럼 살면 안 된다’고 한다. 진짜 삶을 유보하고 돈만, 수단만 내세운다. 인생은 하루살이다. 티베트 유목민처럼 세상에 잠시 천막을 친 거다.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는가. 탐욕으로 우울증이 생기고, 자살만 늘어난다.”

 - 본인은 어떻게 사나.

 “시골 셋집에 산다. 하루 15시간씩 책 읽고, 글 쓰고…. 한 달 100만원이면 족하다. 매일을 불태우니 오늘 죽어도 좋다. 분쟁지역에 가는 비행기에 탈 때마다 유서를 새로 쓴다. 삶의 어원은 ‘사름’이다. 충만한 삶은 축적이 아닌 소멸에서 온다.”

글=박정호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노동자'라는 말조차 불온시되었던 1980년대에 박노해라는 이름은 불온한 기운의 상징이었다.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붓는다…'. 그의 시 < 노동의 새벽 > 은 군사 정권에 항거하는 이들의 창이 되었다. 이어진 수배, 고문, 투옥. 1990년대 말 그가 감옥을 나왔을 때 사회주의는 무너졌다.

그는 기나긴 침묵에 들어갔다. 그리고 12년 만에 사진전과 사진집, 시집을 펴내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찍었던 13만장의 사진 가운데 1백20장을 가려 뽑아 사진전 < 나 거기에 그들처럼 > 을 여는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 걸린 사진에는 드라마틱한 순간도, 얼굴을 통해 드러나는 격정적인 스펙타클 같은 것도 없다. 만년필로 '꾹꾹 눌러쓴' 5천편의 시 가운데 3백편을 뽑아 실은 새 시집 <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에는 이디오피아 고원과 안데스의 산맥, 중동 사막의 가난한 일상이 무심스럽게 펼쳐지고 있다.

침묵 속에 10여 년간 이들과 교감했던 박노해 시인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다른 문화,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과 어떻게 교감하나?

나는 진정으로 찍었는지 가정으로 찍었는지 모르겠다. 시인이든, 사진작가이든, 나는 빛의 통로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들어서버리면 그것을 가려버린다. 저분들을 찍을 때 '야, 이거 그림이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카메라를 내려버린다. 사진작가는 빛의 통로이고, 시인은 민초들의 모든 말씀의 통로이다. 주변 사람들을 찍어주는 것이 최고의 사진작가라고 생각한다.

10여 년간 가난과 갈등의 땅만 찾은 이유는?

나는 본능적으로 나보다 고통받는 사람 쪽에게로 간다. 학살이나 굶주림이 있으면 그쪽으로 자꾸 마음이 가니까, 누가 맛난 거 먹자고 해도 계속 그게 생각이 나는데, 따뜻한 방에 누우면 '다시 오실 거죠'라고 했던 아이들이 생각나는데 어떻게 하느냐.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영혼을 배반했을 때, 첫 마음을 배반했을 때이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얘기했을 때, 마음이 가라는 곳으로 갔을 때, 그때가 평화롭다.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면 마음속에 폭풍우가 가라앉지 못한다.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나?

시인은 본질적으로 예언가이자 혁명가이다. 우리 삶은 네 가지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전 지구적 생태 위기와 전쟁 위기, 양극화와 영혼의 위기이다. 물신이 국경을 지우고 자급자족의 틀을 부수고 세계를 점령하고 있다. 고요한 마을의 전통이 시장 만능의 거센 바람에 떨고 있다. 더 많은 소득을 갈망하면서 인간다움과 아름다운 미래와 강물을 파괴하는 것이 우리 시대이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도 잊어버렸다. 나는 거기서 대안적 삶과 혁명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터가 위험하지 않나?

우리말에, 죽음을 칠성판에 누워간다고 하지 않나. 우리에게는 일곱 개의 목숨이 있다. 일곱 개의 별이 떨어져야 죽는다. 나는 세 번쯤 죽을 위기를 넘겼다. 아직 네 개의 별이 남아 있다. 주어진 삶을 남김없이 불사르지 못하고 늙어서 중환자실에서 진통제 속에서 가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나.(웃음)

종교가 있나?

우리 집안은 원래 가톨릭이다. 형은 신부, 동생은 수녀이다. 나도 고등학교 때까지 신부가 되려고 준비했다. 지금은 산에 가면 부처께 절하고 중동에 가면 알라께 예배하고 인도에 가면 브라흐만에 예배한다. 나는 끊임없이 신앙의 본질에 충실하다.

왜 그동안 침묵했나?

나는 길을 잃어버렸다. 나는 정직하게 절망해야 했다. 실패한 혁명가로 긴 침묵 정진의 시간으로 들어갔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12년의 침묵 정진을 하는 동안 단 하루도 시를 쓰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 힘겨운 시간 동안 시가 없었다면 미치거나 자살했을지 모른다.

왜 시인이 사진을, 그것도 흑백 사진을 했나?

나는 모든 사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더구나 사람은 영물이다. 그 진실의 모습을 어떻게 하면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흑백을 골랐다. 컬러로 하다 보면 색에 걸려 넘어지기 쉽다. 진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데 방해가 된다.

시만 해도 10년에 5천 편이면 굉장한 다작인데.

쌓인 것이 많으니까.(웃음) 시라는 것이 결국은 고통과 슬픔에 대한 지구마을 민초들의 받아쓰기가 아닌가 싶다. 몇 년 전 이라크의 유프라테스 강티그리스 강 사이의 지역을 찾아갔다. 새벽에 여명이 비추는데 어떤 분이 걸어가더라. 1백5살 먹은 할머니였다. 그 할머니가 나를 보면서 '어제는 기다리던 첫 비를 보고, 오늘은 기다리던 태양 같은 얼굴을 보고…. 아들아 집에 가서 빵을 먹자'라고 하더라. 세계 어디를 가도 민초들이 시를 들려준다.

왜 지금 말하는가?

말할 때가 있고, 침묵해야 할 때가 있는 것 같다. 과거 민주 정부 시절에는 모든 사람이 말을 했다. 순수 시 하는 분마저 너무나 난폭하게 이야기하고, 내가 말을 안 하더라도…. 아마 이게 다 때가 있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글로벌 평화 활동을 하면서 빛으로 쓴 시로 사진집을 엮어내고, 펜으로 쓴 시집도 내게 되었다. 이제는 내 안에서 그분들이 말하라고 울부짖는 것 같다. 나로서는 한 매듭을 짓는 것이다. 이제 한 가지만 더 하면 된다. 사회주의가 붕괴된 뒤에 인간 해방의 거대 담론, 새로운 이념의 재생을 위한 책을 감옥에서부터 쓰고 있다. 2014년에 그 책이 나오면 실패한 혁명가로서 마음의 빚을 다 갚고 홀가분하게 행보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집이나 사진전을 두고 예전보다 부드러워졌다는 평이 많다.

절대 폭압의 군사 독재 시절에는 날카롭고 온몸을 던져서 전사처럼 울부짖는 그런 시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민주화가 되고 나니까 참 나쁜 대통령도 나오지 않나. 그것은 국민이 뽑은 것이다. 타도할 대상이 아니다. 이런 시대에 입을 통한 파(破)가 필요하다. 이제는 초등학생도 가리키려 들면 말을 듣지 않는다. 또 내가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고. 이 시집은 내 고백이기도 하다. 누구에게 이렇게 하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동안 경비는 어떻게 조달했나?

10년 전 글로벌 평화 활동 기구인 나눔문화를 세우면서 '정부 지원 무(無), 재벌 지원 무(無), 언론 홍보 무(無)'라는 3대 원칙을 세웠다. 지금도 죽을 지경이다. 사실 현장에 나가보면 그곳의 이웃들이 먹을 것 챙겨주고 재워줘서 큰돈이 안 든다. 비행기 삯이 문제이다. 급할 때는 빚도 냈다. 20~30대 젊은 층의 글로벌 평화 활동 후원 기금이 늘어나고 내가 쓴 책의 인세 자금이 들어오면서 전보다는 낫다. 책이나 사진을 통한 수입은 전액 기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왕 질문했으니 회원이 되어주시라.(웃음)

그는 < 시사저널 > 과의 특별한 인연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 < 시사저널 > 이 내 이야기를 크게 실어주었다. 그때 감방 동료들과 < 시사저널 > 을 돌려보며 공부했다."

김진령 / jy@sisa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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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지난 12년을 침묵하는 동안에 단 하루도 시를 쓰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12년 만에 신작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펴낸 시인 박노해씨(53·박기평)는 13일 “시가 없었다면 미치거나 자살했을지도 모른다”고 털어놓았다.

1999년 ‘겨울이 꽃핀다’를 출간한 박씨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선언 직후 전쟁터로 날아가 평화활동을 시작했다. 최근까지 중동과 아프리카, 중남아메리카 등 세계 전역을 누볐다. 그러면서도 시 쓰기는 놓지 않았다. 무려 5000여편의 시를 육필로 직접 새겼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는 이 수많은 시들 중 304편만 골라서 엮은 것이다.

박씨는 “지난 12년 동안 내가 다녔던 곳은 폭음과 총성이 울리는 폐허 더미의 전쟁터였다”며 “흐느낌 속에서 미치지 않고 죽지 않기 위해 쓴 시가 키 높이를 넘는다”고 전했다.

시인은 본질적으로 혁명가이자 예언자라고 규정했다. “시인은 목에 칼날이 들어오고 가슴에 총알을 받아도 억압받는 사람들 앞에서 진실을 절규할 수밖에 없다”며 “전 지구적으로 생태 위기와 전쟁이 넘치는 시대에 좋은 삶과 진보는 무엇인지에 대해 묻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12년 만의 신작 시집은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시집에 대해서는 “21세기의 세계사와 사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소개했다. “새천년 이후 인류사회의 몸부림이 절절히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라크와 레바논 등 세계화의 모순지를 직접 두 발바닥으로 걸으면서 그 현장의 고통과 희망을 담았다”고 알렸다.

시집 제목은 책의 마지막에 실린 시에서 따왔다. “지금은 달릴수록 영혼이 증발하고 죽음의 냄새가 드리우는 저주받은 자유의 시대”라며 “하지만 그 와중에 인간에 대한 희망은 버리지 않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시의 제목에는 어떤 경우에도 너 자신을 버리지 마라,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간절한 기도이자 희망이 담겼다”며 “우리를 사라지게 하는 것에 대한 강력한 저항과 절규의 목소리”라고 밝혔다.

이번 시집의 편집자는 20대 초반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젊은이들이다. “20대 초반 대학생 5명과 30대 초반의 5명이 수개월 동안 토론하면서 5000편중 304편을 뽑았다”며 “신선하고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미소 지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1980년대를 회고하고 486세대의 추락 등의 내용을 담은 박씨가 아끼는 100편의 시는 책에 실리지 못했다. “젊은 친구들이 이 시에 대해 절실하지 않다고 이야기했다”며 “머리는 움직이는데 정작 가슴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개인적으로는 처절하고 애착이 많이 갔지만 젊은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며 웃었다.

특히, 이번 시집은 “상처와 거짓이 가득한 시대에 아픈 시집이 될 것”이라며 “철저하게 외면 받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짚었다. 그래도 “이 시집을 읽고 아프다면 살아있다는 느낌은 받을 거라 확신한다.”

시인이라도 수년동안 이렇게 많은 시를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쌓인 게 많아서 그렇다”면서 “내 시는 지구마을 민초들 말의 받아쓰기”라고 정의했다. 일례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원한 알 자지라에서 아침에 만난 105살 할머니의 말씀이 생각난다”며 “어제는 기다리던 첫 비를 보고, 오늘은 태양 같은 첫 얼굴을 보고. 먼 데서 온 아들아, 우리 집에 가서 갓 구운 빵과 따뜻한 샤이를 든다고 말씀하셨다”고 전달했다. 이처럼 “세계 민초들은 내게 많은 시를 들려준다.”

박씨는 “깊은 밤 책상 앞에 홀로 앉아 만년필로 꾹꾹 눌러 쓰다보면 숨죽인 통곡처럼 펜 끝을 통해서 시가 흘러나온다”며 “지금도 계속 새로운 원고가 쌓이고 있다. 죽는 날까지 처절하게 시를 써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12년 동안 시집을 내지 않은 이유는 “말할 때가 있고 침묵할 때가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실패한 혁명가로 책임을 져야했고 유명해진 이름마저 스스로 잊혀지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억압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들이 내 안에서 말해 달라고 울부짖는 것 같았다”며 “이번 시집은 나로서는 12여년의 세월에 한 매듭을 짓는 셈”이라고 정리했다.

이와 함께 “사회주의 붕괴 이후 인간 해방에 대한 이념이 실종된 시대인데 새로운 총체 이념을 담은 책을 2014년께 펴낼 생각”이라며 “그래야 실패한 혁명가로서 마음의 빚을 다 갚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여겼다.

시를 포함해 전체적인 인상이 예전보다 부드러워졌다는 평이 있다. “시대 변화에 따른 것 같다”는 답변이다. “과거 절대 폭압의 군사독재 시절이 ‘파(破)’를 통한 ‘입(立)’이 필요한 시대였다면 지금 시대에는 ‘입’을 통한 ‘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생명과 자유와 인권이 억눌려질 때는 그 억압의 실체를 깨뜨리는 것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며 “하지만 지금은 삶이 무엇인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등 구체적인 생활 문화로부터 풀뿌리로 세워가는 사회인 것 같다”고 판단했다. “이 시집의 내용도 내가 이미 살고 있는 삶의 모습 그대로이며 10여년 동안의 내 고백이기도 하다.”

박씨는 “봄과 가을이 짧아지는 등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의 생물이 사라지고 있다”며 “멸종동물 1호는 바로 시인”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야생 그대로의 천연기념물”이라는 것이다. 예전보다 한결 편안해진 분위기다.

한편, 박씨는 2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본관에서 사진전 ‘나 거기에 그들처럼’도 펼친다. 박씨가 찾아간 세계 곳곳의 가난과 분쟁의 모습을 오롯하게 담아낸 전시회다. 10여년간 찍은 사진 13만여장 중 120여점을 골라 선보인다.

박씨는 1957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났다. 현장 노동자로 일하던 19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출간했다. 이 시집은 군사정부의 금서 조치에도 100만부 가까이 판매되며 화제가 됐다. 7년여 수배 생활 끝에 1991년 체포, 무기징역형에 처해졌다. 옥중에 있던 1993년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 1997년 에세이집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출간했다.

수감 7년6개월 만인 1998년 8월15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됐다. 2000년 사회운동단체 ‘나눔문화’(nanum.com)를 설립했다. 중동과 아프리카 등지를 돌며 글로벌 평화나눔 운동을 벌이고 있다.

realpaper7@newsis.com
뉴시스 2010.10.13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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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곳은 G120 회의가 열리는 곳입니다.

11월에 세계 경제 강대국들에서 온 수반들의 G20회의가 열린다고 하는데요,

여기는 전세계 민초들의 120점 사진이 있으니 G120 회의가 열리는 것이죠.(웃음)   

여러분은 그 분들로부터 이 자리에 초청받으신겁니다.


 

이라크 전쟁터는 목숨을 걸고 가야하는 곳인데,

그 험한 곳을 어떻게 다녀오실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전쟁을 멈추게 할 아무 힘이 없잖아요 
그저 폐허더미에서 공포에 떠는 아이들과 
함께 울어주고, 어깨를 안아주고, 
총성이 멈추면 바람 빠진 공을 차며 부모를 잃은 
아이들과 놀아주기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었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 마음이 너무 괴로우니까요

무력한 시인의 무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전쟁을 벌이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레바논 등 중동 국가들에

한국이 전투병을 파병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세계에서 정말 환영을 받았습니다.

코리아가 분단되고 수많은 침략과 수탈을 당하면서도

베트남 한 군데를 빼놓고는 다른 민족을 수탈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파병을 하고난 이후부터는 코리아에  

세계인들의 민심이 무섭게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2003년 이라크 전쟁터에서만 해도 제가 위험한 곳에 가면

항상 그곳의 사람들이 경호대를 자진해서 저를 보호해주었습니다.  

그 지역을 잘 아는 아이들이 제 곁을 따라다니면서 

지뢰가 있으면 긴 막대로 먼저 치워주기도 하고요.   

아마, 제가 작고 못나뵈니까 아이들하고 여자들과 쉽게 친해지고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웃음)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삶을 남김없이 불사르지 못하고 나중을 생각하며 살다보면

생의 마지막 순간에 결국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요. 

 

사진 속 인물들과 굉장히 깊은 교감을 하면서 사진을 찍으신 것 같은데요,

저는 주변 친구들을 찍을 때 충분히 교감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시인님은 타인에게 진정성을 어떻게 발휘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사진 작가든, 시인이든, 뭘 하는 사람이든 간에

자기가 들어서는 순간 진정성은 사라져버리는 것 같습니다.

'아, 이거 그림이다. 작품이 나오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저는 카메라를 내려버립니다.

 

저는 다만 이 분들과 먼저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이 분들의 삶과 진실을 육친적으로 느끼고자 했을 뿐입니다.

 

중남미의 광부들 사진을 보시죠.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가빠 코카잎을 먹어야 하는

해발 1500미터에서 망치질을 해서 일일이 광석을 쪼개고 있습니다.

저렇게 만들어진 광석이 아이폰과 첨단 기계와 우주선의 재료가 됩니다. 

우리가 평면 텔레비전을 한 대 사면 

이분들의 수고가 담긴 노동이 들어간 것을 사는 것이구나,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며 일을 도와 드리고 가족처럼 지냅니다. 

 

그러다 보면 제 자신은 없어지는 겁니다.

제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사심없이 함께 있다보면

그 분들도 저를 의식하지 않게 되면서 동화가 되는거죠.

 

저는 다만 '빛의 통로'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저분들을 찍은게 아니라

카메라를 통해 저분들이 제 가슴에 진실을 쏜 것입니다.

 

시인님을 움직이는 동인은 무엇인가요?

 

저는 웃는 근육이 발달된 사람이어서 좀 많이 웃습니다. (웃음)

노동이 힘들고 삶이 힘들 때 웃지라도 않으면 어떻게 삽니까?

그래서 많이 웃는데요, 사형선고 받고도 웃었습니다.

고문당할 때는 너무 힘들어서 야수처럼 비명을 지르다

목소리가 다 터져서 소리가 안 나오더라고요.

그 때 말고는 감옥에서 무기징역을 살 때도  내내 참 많이 웃었습니다.

그랬더니 안기부가 감옥에 와서는 간수들에게 

제가 많이 웃고 인사 잘 하고 친절한 건

전형적인 공산주의의 통일선전술이니 속지말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저는 실패한 혁명가입니다.

70-80년대 때 군부독재 시절은 여러분들이 다니는 학교 교문 앞에는 탱크가 진주하고

여학생들의 가방을 뒤져 생리대까지 꺼내 흔들던 시대였습니다.  

대통령도 우리 손으로 못 뽑고, 노동 3권도 없고, 집회시위도 언론자유도 없었죠.

 이런 상황에서 저는 인간해방의 지름길은 사회주의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는 붕괴하고 말았죠.  

슬프게도, 저는 길을 잃어버렸고 정직하게 절망해야 했습니다. 

실패한 혁명가로서 책임을 져야 했고, 12여 년 동안 사회적으로 묵언하며

유명해진 이름 마저 스스로 잊혀지기를 바랐습니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긴 침묵과 정진의 시간이었습니다.

 

제 마음 속의 깊은 슬픔과 치명적인 사랑의 상처는 본능적으로

더 큰 슬픔과 상처 난 사람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했고

국경 너머 전쟁터와 기아분쟁 현장을 다녔습니다.

아픈 곳이 몸의 중심이듯이 그곳이 저에게는 세계의 중심이었습니다.

 

인생에서 정말 고생해온 분들에게 죄송하지만

저도 이 작은 몸으로 고생하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돌이로 차별받으며 엄청 두들겨 맞기도 했고,

한시도 긴장을 놓지 못하던 긴 수배생활에 무기징역살이,  

석방되서는 한쪽에서는 빨갱이, 한쪽에서는 변절자라고 손가락질 받았습니다.

평화활동을 하면서 이스라엘 여군들에게 그렇게 많이 맞아본 것도 처음입니다.

정말 무기를 든 자들은 인간이 아니던데요.

돌아서면 그렇게 예쁜 소녀들이 총구로 가슴을 찌르고 갈비뼈에 금이 갈 정도로 때리고..

 

하지만 몸이 힘든 것은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운 건 자기 영혼을 배반할 때입니다.

사람은 마음이 편해야죠.

저에게 매달리며 '다시 오실거죠' 했던 아이들이 자꾸 생각나서

맛있는 걸 한 끼 먹어도 따뜻한 잠자리에 누워도 마음이 불편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기 위해 
이웃의 가난과 고통을 외면하는 자의 마음은
늘 폭풍우를 간직하게 됩니다.   

고통 받고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걸어가는 자에게는 
늘 평온함이 함께 합니다.  


 

 

 흑백사진을 찍게 되셨나요?

대륙마다 다섯 점의 컬러사진이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모든 사물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색깔은 현실을 잘 재현 하고 있지만, 또 너무나 쉽게 조작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진실 속으로, 영혼 속으로, 삶 속으로 들어가는데 방해가 됩니다.

흑백사진은 사물 속의 영혼만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 영혼과 대화를 하며 색깔을 넘어선 것을 찍고 싶었습니다.  

 

컬러 사진 5점을 전시하게 된 것은 시인의 친절함 중의 하나입니다.(웃음)

그 대륙을 잘 표현하는 색감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보시는 분들이 그 대륙의 상상력을 가질 수 있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찰나에 필름이 떨어져서

디지털 카메라로 어쩔 수 없이 찍었던 사진입니다. (웃음)

 

사진을 보며 벅차서 울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사진을 보니까 반성이 되는 것 같아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교육에 대해서 묻고 싶습니다.

 

교육이라는 게, 학교라는 게 뭘까요?

저는 제도화된 학교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육제도는 악입니다. 단호하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데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다 사진학과를 가야 됩니다.

요리를 하면 요리를 직접하면 되는데 이탈리아 유학을 갔다와야 합니다.

죄송하지만 그 만 명 중 한 명만 취업을 하게 되겠죠.

우리는 우리 안에 이미 타고난 천재성을

시장, 대학, 국가의 삼중억압에 저당잡혀 사육당하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만난 아홉살 수잔나라는 소녀가 있는데요.

얘가 둘라를 하나 메고 양을 치고 있으면 그렇게 포스가 넘쳐요. (웃음)

사진을 찍고나서 '수잔나, 네 양이 몇마리냐' 물어보니까 몇 마리인지 모르겠다고 하는거에요.

얘가 학교를 안 다녀서 숫자를 모르는구나 했더니

'이 양은요, 지금 새끼를 배고 있구요,

얘는 하루에 젖을 양 두 마리가 짜는만큼 주고 있고

얘는 발가락을 다쳤어요' 하며

50마리를 다 소개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몇 마리인지 몰라?' 하니까

'제가 양을 100번 센다고 한 마리가 늘어나나요?',

 

저는 그 순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물의 질적차이를 알지 못하는 숫자는 죄악입니다.

숫자가 삶을 뒤덮어버리는 것은 삶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하나의 잣대로 한줄로 줄세우는 사회는 이미 삶이 죽어버린 사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학교에서부터 체계적으로 교육받고 체계적으로 폭력을 당하고 있죠.

봄이면 제일 가슴이 아픈 풍경이 열여섯 코리아의 소녀들입니다.

가장 꽃같은 나이에 가장 음울한 얼굴을 하고

가장 싱싱한 나이에 가장 끔찍한 교복 패션으로 지냅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아이들에게 우리 부모세대가 진짜 나쁜 세대입니다.

전쟁과 식민지와 군사독재를 힘들게 벗어나 

해외여행 보내주고 좋은 대학 다니게 해서

우리가 글로벌 코리아로 세계 10위 반열에 올라갔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우리는 가난했어도, 평상에다 모닥불 피워놓고

할머니나 부모님의 오래된 옛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느 순간 내 가슴이 눈물로 범람하고 비옥한 옥토가 쌓였었는데

이제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까?

 모두 과외에 맡기고 인터넷에 텔레비전에 맡기고,

우리 언어는 전부 비즈니스 언어, 티비 예능프로 언어, 마케팅 언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좋은 인문학을 읽힌다고 어떤 의미가 있을까, 회의감이 듭니다.

 

제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의 빈민학교 교장을 맡았는데요.

아이들에게 무조건 농사시켰습니다.

아이들 농사시켜서 길거리에서 고구마도 팝니다.

이걸로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살려주세요'라고 외치며

나눔문화가 세운 난민촌 학교에 수익금도 전달했습니다.

편지도 주고받지요. 그러면서 아이들이 변화합니다.

그렇게 7년이 지나니까 처음으로 고등학교 졸업한 아이들이 나왔고

이 아이들이 나눔문화 회원이 되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전 이런 것이 인간승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 자기 삶의 이야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대자연을 품을 때, 가슴 속에 시가 흐르고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인데요, 아까 사인 받으면서 만져본 손이 참 따뜻하시더라고요.

따뜻한 손을 오랜만에 만져본 것 같습니다.

사진을 둘러보면서 슬프기도 하고 여러가지를 느꼈는데요.

저도 힘들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해 세상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혁명가, 그런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저 분들을 위해서 뭘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지금은 좋은 말이 난무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헛된 위안들이 도처에 깔려 있고, 거짓 희망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풍요는 우리 젊은이들의 영혼을 잠식하고

너무 많은 지식으로 지혜를 말라붙게 만들었습니다.

저주받은 자유의 시대입니다.

지금 단군이래 가장 똑똑한 젊은이들이 일다운 일자리도 얻지 못하고

부모에게 빚지고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67억 인류 속에서 보면 대한민국에는 가난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만 있을 뿐.

그런데 아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루 중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을 노동하는 일터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앞만 보고 높은 소득을 향해 질주하느라

내 영혼과 가슴이 일치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대신에 자기를 팔고 있죠.

 

이런 시대 속에서 정말 대안적인 혁명을 해보겠다고 몸부림쳐도

저는 단 한사람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래서 전 누구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 무력함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뼈저리게 압니다.


다만 그 거대한 악의시스템에서 나 자신이라도 온전히 지켜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그때 난 ‘안 팔아!’ 라고 말하면 됩니다.

거대한 시스템이 짓눌러도 끝끝내 무릎 꿇지 않는 단 한 사람만 살아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진정한 나 자신을 잃지 말고,

내 영혼의 불을 꺼뜨리지 않고 꾸준히 밀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답답한 학교생활을 11년째 하고 있는 고등학생인데요.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나서도 따뜻한 마음,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하루하루를 보내야 할까요?
그리고 선생님이 저희 나이 때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해요.
 
사진 보러 온 게 아니라 인생상담하러 왔네?(웃음)
사진 속 비슷한 또래 친구들을 보며 많이 느끼죠?
해발 5000미터인데도 알파카 치는 사령관이 되어서 뛰어다니잖아요.
난 열 걸음도 못 따라가겠던데...
 
여러분은 부모세대를 마음껏 원망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에게 돈으로 살 수 있는 능력만 키워줬을 뿐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은 체계적으로 박탈해버린
역사상 죄가 제일 많은 세대가 우리입니다.
 
그리고 돌아갈 곳은 남김없이 잃어버렸습니다.
탐욕의 포퓰리즘에 휩쓸려서
고향이고 농토고 전통이고 문화고 다 밀어버렸어요.
뒤에는 시멘트 사막 밖에 남은 게 없어요.
굽이굽이 수천년 흐르던 강물은 우리 무의식에 존재하며
마음이 말라붙을 때도 그 강을 떠올리며 다시 일어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오리배 띄우고 기름배 띄우고 그 옆에 관광단지를 만든다고 하네요.
 
저는 열 다섯살 때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왔어요.
그때 그나마 젊음의 유일한 탈출구는 공장 다니다가 휴일되면 다방에 가는 거였어요.
옛날식 다방에는 어항이 하나 있었어요. 붕어가 물이 탁해서 그런지 힘없이 죽어가더라고요.
너무 괴로워서 창자를 토해내듯이 토하는 거에요. 몸 속이 계속 더러워져 숨이 막히니까요.
저게 내 모습이겠다 싶더라고요.
내가 개인으로 아무리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려고 해도
이 사회의 시스템과 생활문화가 공기처럼 하루하루 나를 잠식하고 있다고 느꼈어요.
이 거대한 어항을 깨뜨려 흐르게 하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고상하고 영성이 뛰어나다고 해도 소용 없다는 것도요. 
 
이런 상황을 이겨내고 좋은 마음을 간직하고 싶다면 좋은 벗들을 만나세요.
좋은 벗들과 함께하는 우정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만약에 그 험한 세월을 지내면서 영혼이 맑고 좋은 친구들이 없었다면 아마 미치거나 죽었을 거에요,



 

박노해 시인은 마지막으로 안데스 만년설산에 있는 

께로마을에 가던길의 

 

 

 

이야기를 전하며 

 

 

 

작가와의 대화를 마쳤습니다.

 

"께로마을을 가기위해 만년설산을 오를 때였습니다.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던 고산지대인데, 

제 걸음으로 30시간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께로마을에서 빛나는
희미한 등불 하나를 발견해서 살 수 있었죠.
 
우리들 마음속에 품었던 꿈도 희망도
끝없는 어둠 속을 걸어가듯 숨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대한 어둠이 우리를 뒤덮어도

희미한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한 것입니다.

 

삶은 기적입니다

인간은 신비입니다

희망은 불멸입니다.

 

단 한사람만 살아있다면,

그대 희미한 불빛과 사랑과 나눔만 살아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나눔문화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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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보니 사진 한 컷 한 컷 마음을 담으신 것 같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사진을 찍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 현장을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정말 이 분들이 가장 절실하게 저의 카메라를 원할 때,

그리고 그 진실을 알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할 때, 카메라를 듭니다.

이번에 칠레광부 매몰 사건을 보셔서 익숙하시겠지만,

제가 찍은 사진 중 페루의 까미광산 사진이 있습니다.

해발 5000미터 지대인데요. 지하 1000미터까지 내려갔거든요. 정말 죽겠더라고요.

산소는 희박하고 아주 후덥지근한 곳입니다. 그래서 코카를 물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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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도 입구의 광석 추출 ⓒ 박노해



이곳의 광부들은 광석을 캐와서 손발로 일일이 쪼아서 깹니다.

광석 하나하나가 우리가 쓰는 아이폰에 들어가고 첨단 LCD 모니터에도 들어가고

첨단 우주선에도 사용됩니다. 우리가 입고 쓰는 물건들이 이렇게 만들어지죠.

그림이 좋아서가 아니라 사연이 절절해서 찍은 겁니다.


저는 제가 정말 사랑하는 집단이나 미워하는 집단만 찍는 것 같습니다.

약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도 카메라이고,

강자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도 카메라입니다.

카메라를 든 이상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시인이 책상 앞에서 죽을 일은 없지만,

분쟁현장에서 카메라를 들 때는 여기서 한걸음을 더 갈건지, 말건지

늘 결단의 순간마다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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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침묵절필을 오래 하셨는데..

오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라는 시집을 내셨어요.

10년만에 시집을 내게 되셨나요?


사람이 말할 때가 있고 침묵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한 마디 말에 담긴 침묵의 무게와 크기와 깊이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보고 이야기할 때 계속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러는 게 좋은가요?

누구나 안아주는 프리허그요? 전 누구나 안아주는 가슴에 안기기 싫거든요.(웃음)

그건 신만이 할 수 있는 거죠. 정말 그윽하게, 서로 침묵 속에서 나오는 그 한마디가

우리 가슴을 떨리게 하죠. 너무 쉬운 사랑고백은 믿기지가 않잖아요.


마찬가지로 제가 감옥에서 막 나와서 보니 민주화와 자유가 이뤄진 시대에는

'누구나 옳은 말을 할 수 있구나, 누구나 바른 말을 잘하는구나..

광장의 비둘기처럼, 하늘을 나는 새떼처럼, 말이라는 게 아무것도 아니구나'하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말은 모든 것입니다. 말의 힘은 삶의 힘입니다.

이제는 말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사실 가장 훌륭한 계획자는 하늘입니다.

저는 모든 것을 계획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랑안에 자기를 던져서 사랑 안에서 길을 잃으면 됩니다.

그러다보면 사랑이 우리를 데려다 주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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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입니다. 음악을 전공했는데요.

꿈을 따라 살고 싶은데 주변 눈치가 보이고 스스로가 비겁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만들어내는 습작의 결과물에 대해 언제나 초라함을 느끼고

만족감과 자신감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 눈치보지 않고 계속 꿈꾸던대로 용기있게 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격려가 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용기가 될만한 말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여기 오셔서 그런 말씀하시는 것 자체가 위대한 용기입니다.

우리 시대 진지한 젊은이들의 고민과 상태를 집약해서 말하는 그대는 개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내가 개인이 되어 '내 꿈을 찾고 이루고 해냈다' 이거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이 불의한 시대가, 물신과 탐욕의 포퓰리즘의 시스템이 우리 젊은이들 모두에게 난사한 총알이기에,

그것은 사회적 영혼으로 생각하고 품어야될 문제 같아요.

그런데 시간의 중력의 법칙은 참 무섭습니다.

만류인력의 법칙은 사과만 떨어뜨리는게 아니라 젊음도 첫마음도 꿈도

시간이 지나면서 무너져 내리거든요.

처절하게 저항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거대한 욕망의 삼투압이 내 안으로 치고 들어옵니다.

자연에는 진공상태가 없듯이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시골집에 있는 밭을 사진전 준비하느라고 몇달 못 돌봤더니

어느새 풀이 가득 자라있어요. 풀을 뽑아내고 뒤를 돌아보니 또 풀이 자라요.

거의 풀이 쳐들어오는 수준입니다.

풀보다 더 무섭게 우리 사회에서 탐욕과 경쟁과 비교와 시선의 칼날들이 더 무섭고 치고들어오고 있습니다.


자신감이 생기려면 자신을 버리면 됩니다.

자신을 지키려는 자, 자신을 세우려는 자는 늘 남과 비교해야 하기 때문에 늘 자신감이 없게 됩니다.

실패해야 이룰 것을 이룹니다. 실패해서 헛된 희망과 헛된 욕망을 버려갈 때.

가슴에 새겨지는 상처를 가득 받으십시오. 가장 상처받는 지점이 가장 욕망하는 지점입니다.

상처를 들여다 보시고 그 상처를 혼자가 아닌 좋은 벗들과 함께 나누고 공유하며 치유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나눔문화에 한번 놀러오세요. 20,30대 젊은 친구들이

주말에 텃밭 빌려서 농사도 짓고 모임도 갖고 가슴 속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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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마을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보편적인 인권의 잣대를 내세우는 것이 중요한지..

시인의 의견을 묻고 싶습니다.


'그곳에서는 그들처럼' '나 거기에 그들처럼' 여기에 그 모든 답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문제는 그분들이 해결할 문제이구요.

그 분들에겐 검은 석유를 약탈하려고 침공하고 수탈하는 강대국 식민지배의 사슬만 물리치면 됩니다.

폭격당한 이라크, 팔레스타인, 레바논 거리에서 가장 많이 붙어 있었던,

그러나 서구언론에서는 단 한줄도 보도하지 않았던 플랜카드와 슬로건이 뭔지 아세요?

"Don't kill us , Don't help us"
"우리를 죽이지도 말고 돕지도 말라, 우리 삶을 우리가 결정하게 내버려 두라"


오른쪽으로 치우쳐있는 나무를 억지로 왼쪽으로 끌어당긴다고 해서 균형이 맞을까요?

겉으로 보기에 당장에는 괜찮아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 나무의 뿌리는 다 죽어버립니다. 삶이 다 죽어버립니다. 삶은 나무입니다.

옳은 변화도 중요하지만 삶과 사회를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것은 위험합니다.

경제와 시장은 동물성의 속도로 달려가지만 사회와 정신은 나무처럼 느리고 꾸준하게 자라납니다.

그 판단은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 그 분들의 지성을 믿고,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제가 분쟁현장이나 가난한 지역에서 창조적인 나눔실천을 하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절대 폭력적인 강제나 모 아니면 도 식의 다수결로 정하지 않습니다.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토론하고 모두가 동의하는 결론이 나올때까지 기다립니다.


께로족 마을에서도 지금 토론이 한창입니다.

마을에 태양열 전기를 도입하기로 했는데 저랑 같이 하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과연 어디까지 할거냐? 500년 만에 마을에 세워진 학교건물 공회당에만 전기를 넣을거냐.

아니면 집집마다 할거냐. 전기가 들어가면 텔레비전을 같이 놓게 되거든요?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있으면 좋은 점은 뭐고 해악은 뭔지 주민들이 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현지에 나직이 스며들어가 그곳의 사람들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내 마음이 애정으로 이끈 것이라면 어떤 것이 가장 좋은지는 그 답이 자명하게 나옵니다.

우리가 좀 많이 배우고 선진화되었다고 현지에 강제로 무엇을 심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살려지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삶은 선대의 수많은 이름없는 의인들과 소리없이 한점 꽃잎처럼 사라져간 분들의

숨결과 정신의 빚을 지고 먹고 사는 것 아닌가요?

우리나라는 물질적으로도 70-80퍼센트가 수출로 먹고살기 때문에

세계 온 대륙의 노동과 눈물과 한숨으로 먹고 사는 겁니다.

절집에 가면 '조고각하'라는 말이 붙어있습니다. '들어올때 신발 정리 잘하쇼'라는 말이지만

지구시대에 우리가 누구를 딛고 사는지 발밑을 돌아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詩  부모로서 해줄 단 세 가지 박노해

 

무기 감옥에서 살아나올 때
이번 생애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혁명가로서 철저하고 강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허약하고 결함이 많아서이다

 

하지만 기나긴 감옥 독방에서
나는 너무 아이를 갖고 싶어서
수많은 상상과 계획을 세우곤 했다

 

나는 내 아이에게 일체의 요구와
그 어떤 교육도 하지 않기로 했다
미래에서 온 내 아이 안에는 이미
그 모든 씨앗들이 심겨져 있을 것이기에

 

내가 부모로서 해줄 것은 단 세 가지였다

 

첫째는 내 아이가 자연의 대지를 딛고
동물들과 마음껏 뛰놀고 맘껏 잠자고 맘껏 해보며
그 속에서 고유한 자기 개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자유로운 공기 속에 놓아두는 일이다

 

둘째는 '안 되는 건 안 된다'를 새겨주는 일이다
살생을 해서는 안 되고
약자를 괴롭혀서는 안 되고

물자를 낭비해서는 안 되고

거짓에 침묵동조해서는 안 된다

안 되는 건 안 된다! 는 것을

뼛속 깊이 새겨주는 일이다

 

셋째는 평생 가는 좋은 습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자기 앞가림은 자기 스스로 해나가는 습관과

채식 위주로 뭐든 잘 먹고 많이 걷는 몸생활과

늘 정돈된 몸가짐으로 예의를 지키는 습관과

아름다움을 가려보고 감동할 줄 아는 능력과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홀로 고요히 머무는 습관과

우애와 환대로 많이 웃는 습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그러니 내 아이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유일한 것은

내가 먼저 잘 사는 것, 내 삶을 똑바로 사는 것이었다

유일한 자신의 삶조차 자기답게 살아가지 못한 자가

미래에서 온 아이의 삶을 함부로 손대려 하는 건

결코 해서는 안 될 월권행위이기에

 

나는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고자 안달하기보다

먼저 한 사람의 좋은 벗이 되고

닮고 싶은 인생의 선배가 되고

행여 내가 후진 존재가 되지 않도록

아이에게 끊임없이 배워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저 내 아이를

'믿음의 침묵'으로 지켜보면서

이 지구별 위를 잠시 동행하는 것이었다

시인께서 '길을 잃은 시대' 라고 하시는데, 
지금 이 시대가 왜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요즘 20대 젊은이들보고 패기도 없고 젊음다움도 없고 
비루하게 살아간다고 기성세대 분들이 뭐라고 하는데 저는 그럴때마다 분노합니다. 
지금 세대는 네 가지 굴레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전지구화된 사회양극화 구조이고, 
두번째는 난무하는 지식으로 인한 의식의 혼란입니다. 

더 무서운 두 가지는 뭔지 아시나요? 
셋째는 현대문명 자체입니다. 일상이 거의 식민지처럼 변했습니다. 
우리는 속도와 소비와 돈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끔 만들어버린 
숨막히는 시장만능 시스템 속에 던져져 있습니다. 
내가 청주까지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고 싶어도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려면 목숨걸고 고속도로를 지나가야 합니다.


정점에 달한 비즈니스 문명, 석유 문명 시스템으로는 
우리의 미래가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진정 좋은 사회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적은 사회입니다.
요즘은 아프면 가족이나 친구가 돌봐주는게 아니라 간호사를 부르고,
간호대학 자격증 비즈니스가 생기는 식이잖아요.
삶의 자율성이 모두 돈으로 얽매여 버리는 겁니다.
이제는 일자리 보장도 안 됩니다.
기업들이 경쟁력을 갖추려면 생산성을 높여야 하거든요.
생산성을 높이려면 자동화 시스템으로 갈수밖에 없습니다.
첨단기계가 일하면 사람은 일할 필요가 없죠
아산에 있는 삼성 LCD 공장이 상암축구장 7개 크기인데
일하는 사람은 350명 밖에 안 됩니다.


4대강 공사가 일자리를 창출한다고요?
지금 4대강에서 중장비가 일하지 청춘남녀들이 일하나요?
우리는 헛된 거짓희망을 넘어서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무서운 건 개인주의와 자기중심주의입니다.
대학,시장, 국가라는 거대한 억압의 삼각동맹 시스템이 우리를 유치원 때부터 몰아세웁니다.
우리 안에 내면화되어 있지요. 삶에서 진짜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 많은 사람인데 시간이 많을수록 초조하고 불안해지죠.
비교경쟁해야되고 심지어 외모경쟁까지 하고 이 도시의 전쟁 속에서
첨단무기인 명품 백이라도 들지 않으면 도저히 싸보여서 다니지도 못하고,
자기가 가진 물건으로 스스로가 저렴하지 않다는 걸 입증해야 되고...
이건 정말 폭력적인 시스템입니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관심에만 사로잡혀 남을 돌아볼 틈도 여유도 사라져 버렸어요.


자유를 향해 탈주하고 싶어도 이미 스스로의 안에서 사전검열되고
자기 중심주의의 덫에 갇히고 단군이래 가장 지식이 많은 세대이기 때문에
지식의 덫에 자꾸 굴러떨어지게 되는거죠.
하다못해 어느 종교나 대학 소속 아니면, 유학 자격증 없으면 불안해 합니다.


우리는 네 가지 덫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잘살고 선진화가 되기 위해서는
질주해야 한다고 확신을 갖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의심하고 경계하십시오.
현실에서 가장 현실적인 건 자기 첫마음이고 꿈이고 이상입니다.
현실처럼 빠르게 변하는게 어디있나요? 현실처럼 비실제적이고 비실질적인게 어디 있나요?
오히려 이상과 꿈이, 지금 보기에는 추상적이고 미친 소리인 것 같지만 가장 현실적입니다. 

어렵고 힘든 나라를 많이 다녀오셨는데 가장 감동하셨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한 장 한 장이 다 감동인데 어떻게 얘기하죠? 대신 제 심장의 박동을 드리겠습니다.
40만 명이 쓰나미로 한꺼번에 죽은 반다 아체나,
날마다 폭격이 진행되는 팔레스타인, 쿠르디스탄, 이라크...
이런 곳에서 참 신기한걸 봤어요. 자살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강력한 생의 의지죠. 특히 부끄러웠던 것은 정치적 고아들에 대한 겁니다.
아버지와 형이, 누나가 저항 게릴라로 활동하다 죽고 고아가 된 아이들인데,
마을 사람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회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나눔문화에서 창조적 나눔실천을 하기 위해
현지에서 자급자립할 수 있고 지속가능한 나눔이 뭘까...
이런걸 주민들과 끝없이 논의합니다.


저는 어느 지역에 가든 원칙이 있는데요.
아이들과 여자들까지 다 회의에 참석시키라고 합니다.
무슬림은 원래 남자들끼리만 회의를 하려고 하는데 제가 몇 시간을 우겨서 관철시키거든요.
그리고 자꾸 여자들에게 발언기회를 줍니다.
나중에는 남자들이 큰 절을 하며 말하더라고요.
"제가 10년 동안 제 아내와 살아 왔지만 제 아내가 
이렇게 똑똑하고 식견이 뛰어난지 몰랐습니다." 
그 다음에는 마을회의가 여성들도 참석하는 문화로 굳어집니다.


그런데 거기서 저도 모르게 "아이들 고아원을 어디에 짓죠"라고 하니까
여성 분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아니 샤이르 박, 코리아는 마을에서 부모가 죽고 
형제자매도 없는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냅니까?
고아원이 있는 사회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사회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프고 돈이 없고 폐허더미에 천막을 치고 살지만 
이 마을 아이들은 우리가 키웁니다."
하며 분노를 하시는겁니다. 이런게 바로 인간의 위엄과 품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에 제가 새로 펴낸 시집에도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담겨 있으니 한번 보시죠...
너무 책 티저광고 같나요? (웃음)"


오늘 광주에서 시인을 만나기 위해 올라왔습니다.
사진이 참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사진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사랑한만큼 보입니다.
사진이 어떻고, 미술이 어떻고, 바로크 양식이 어떻고...
아는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요.
앎에 걸려 넘어지지 마시고 가슴으로 보시면 됩니다.


흑백사진을 찍게 된 이유와 흑백과 컬러 사진에 대한 시인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세상이 너무 현란하기 때문에 색이 그 사진속으로 깊이 들어가는데 방해가 됩니다.
사람은 궁할 때 궁리하게 되고 통하게 됩니다.
물질적으로 결핍할 때 간절한 창조가 나옵니다.

도구가 단순할 수록 그 현장의 사람들 삶 속으로 다가가야만 합니다.
뭐든지 물질적으로 풍부하면 생명력은 시들어 버립니다.
흑백을 가만히 보면 흑백에는 수많은 명암이 있고, 
검정과 하얀색 속에서 찬란한 사물의 본래의 색깔이 있습니다.
만약 세상이 차분해지고 고요할 때 저는 칼라 사진을 찍게 되겠지요.
그런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참을 온실 속에서 부모님 보호 아래서만 자라온 스무살 입니다.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요. 부모님 도움 아니면 학교도 못 다닙니다.
사진 속의 아이들 모습을 보며 많이 부끄러웠어요.
새벽부터 나무를 해서 시장에 파는 소녀나 
폭격더미에서 살아남은 샤나 살흡 앞에서 '나는 불구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부모님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할 수 있을까..

용기를 가지고 살아낼 수 있을까..
이런 젊은이들에게 용기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명박산성보다 더 뛰어넘기 어려운 것이 부모산성이라고 하죠? (웃음)
경제성장의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던 세대가 물려준 넘치는 풍요가, 
젊은 세대들에게 오히려 독소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의 부모들이 지금 우리 아이들을 애완견으로 만들었습니다.
저에게 찾아온 대학생들 열에 여덟아홉이 아직도 아이 목소리를 냅니다.
나이가 스무살이 되었는데.. 부모에게 단 한번도 아이 목소리를 
지적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친구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더 무서운건 이제는 부모가 자식에게 좋은 책도 다 골라 줍니다.
386세대 중에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부모가 자녀를 저한테 데리고 옵니다.
그러면 제가 '너 참 인생 힘들겠다'고 얘기합니다.
좋은 책도 부모님이 골라주고 좋은 말도 생각도 체계적으로 주입시켜 주니까요.


그런데요. 생명은 버티고 반항하는 힘이 있어야만 자기만의 힘이 생깁니다.
'등용문'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폭포에서 잉어가 거슬러 올라갈 때 생명력이 생겨서 펄떡이는걸
용문이라고 하거든요. 거스르지 않으면, 버팅기지 않으면, 실패하고 저질러보지 않으면
어떻게 자기 내면에 차오르는 힘이 생깁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님들이 전부 쥐어짜서 아이들 유학은 다 보냅니다.
부모속에 당신의 적이 들어있습니다.
낡은 세대가 당신의 부모속에 들어있습니다.
조금은 가슴 아프게... 쓸쓸하게.. 부모와 싸워 넘어서야 합니다.
자기 길을 찾지 못하는 자는 영원한 어릿광대가 되고 맙니다.
부모의 의무는 자식에게 기꺼이 패배를 인정하고 져주는 겁니다.

내 가슴에 시인이 살아있지 않으면 젊음이 아닙니다.
반항아가 살아있지 않으면 젊음이 아닙니다. 
탐험가가 살아있지 않으면 젊음이 아닙니다.


그대는 인류가 부러워 하는 스무살 청춘입니다.
그런데 자기 가슴안에 혁명가가 살아있지 않는다면...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미 그대의 젊음은 지나가버렸음을..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요?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불교에서 '법등명 자등명'이란 말을 쓰는데요.
오직 '진리의 등불에만 의지하고 너 자신에만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다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죽어야할지를 생각합니다.
제가 세계지역을 다니며 사막을 가다 낙타가 쓰러지는 걸 본 적이 있거든요.
모래바람 하붑이 몰아치는데 낙타 떼가 1천마리, 2천마리 행렬이 지나가요.
사막을 걷는 낙타는 일생 동안 푹푹 빠지는 모래더미를 자기 몸에 진 짐의
무게로 한 걸음도 건너뛰지 않고 묵묵히 걸어갑니다.


줄지은 낙타 행렬에서 한 마리가 이탈해 비틀비틀 걸어나오는 겁니다.
자기 최후를 직시하고는 자기의 사막 지도가 되었던 물 냄새나는 나일강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가는 겁니다. 그 순간 낙타를 몰고가던 몰이꾼 청년도
낙타들의 행렬도 걸음을 멈춥니다. 그리고 떠나는 낙타를 바라보죠.


떠나는 낙타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일생동안 쉼없이, 무거운 짐을 나눠지고 수천킬로 사막을 함께 걸었던 
정든 동료들을 바라본 뒤에 몇걸음 더 가다가 거인의 최후처럼, 

자기 사명을 다한 자처럼 서서히 쓰러져 갑니다.
한 청년이 한쪽 무릎을 꿇고 경배를 올린 다음 무리들과 함께 다시 걸음을 옮깁니다.
그렇게 사막에 가면 낙타가 죽어서 남긴 흰 뼈 이정표가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저는 세상에 업적을 남기는데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떠날 때 들고갈 것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고 그 분들께 바쳤던 

제 무력한 사랑, 상처난 마음, 그것 하나 딱 가져갈 겁니다.

저도 20대 대학생인데요. 시인님께서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보이셨는데
저는 제가 누군가를 위해 울어주고 사랑하는 순간은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생길 때라고 미뤄왔어요.
그런데 이제는 정말 타인을 위해 사랑하고 울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어떻게 하면 진심으로 그럴 수 있을까요?


저는 누구를 위해 울어본 적도 없고, 누구를 위해 희생해본 적도 없습니다.
단 한 번 뿐인 제 삶을 저답게 잘 살기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가난한 자를 위해, 누구를 위해 희생하고 그 분을 위해 울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저 자기를 찾아 자기답게 사세요.
누구를 위해 하겠다는 마음으로 하면 반드시 보상을 바라게 돼요.

사랑은 누구를 위해 짜내려고 하면 안 나옵니다.


제가 물 한 모금 마시고 책 하나 펴내고 커피 한잔 마시는데
50개국 이상의 노동력이 들어갑니다.
세계 밑바닥에서 인류를 떠받치며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노동을 하며
인류 전체를 먹여 살리는 게 누구입니까?
우리 첨단 반도체와 아이폰 먹으면서 살 수 있나요?
농사지은 밥으로 먹고 삽니다.
우리는 살아가는게 아니라 살려지는 존재입니다
.
그렇기에 누구를 위해 울어주겠다는 생각하지 마시고
자기를 우십시오. 가능하면 크게 우십시오.
그러면 나와 남이 떨어져 있지 않은 존재라는 걸 아실겁니다.
사람은 다 영혼을 가진 존재잖아요.
소득 3만 달러 만들어준다고 행복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죠.
자기 영혼에 충실하면 됩니다.


사람은 물질적인 결핍에 대해선 금방 적응합니다.
50평 짜리 집에서 살다가 30평 이사가면 처음에는 불편해도 다 적응합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이 편하지 않을때,
자기 영혼과 불화하는 건 결코 적응이 안 됩니다.
여기에 적응하는 순간 그 존재는 이미 끝난 겁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아무리 미욱한 사람일지라도
물질로 굴복시킬 수 없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힘이 살아있음을 저는 굳게 믿습니다.

 



박노해 시인은 오신 분들에게 헌시를 바치며

작가와의 대화 시간을 마쳤습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정신이
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박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 신작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수록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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