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ENGLAND

우드스톡

솔솔숲 2014. 3. 25. 22:46

5월15일(화)

 

버몬트주의 우드스톡은 동네 이름만 떠올리면 목재만 쌓여있을 것 같은 산골 이름 같아도, 매우 작은 도시이지만 중후한 멋을 지닌 아름다운 도시다. 일찌감치 영국 총독의 면허를 받아 카운티의 행정도시로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어제부터 쏟아지는 장대비가 아침에 잠깐 멈추는 듯 해서 중앙로를 한 바퀴 돌며 산책했다. 잘 단장된 집들과 멋진 디스플레이로 한층 멋을 뽐내는 가게들, 그리고 짜임새 있는 도시 배치와 오타퀘치강의 운치 있는 흐름이 인상적이었다. 중심지역을 한 바퀴 도는 데 30분도 안 걸리는 것 같다. 길가에 세워진 간판 하나도 매우 세련된 디자인과 우아한 장식으로 나그네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평범한 집들도 창가와 외벽에 세심하게 배치되어진 장식들이 앤틱 박물관 구경을 하는 듯 한 기분을 풍겨준다. 요즘 계속 내리는 비로 세차게 흘러내려가는 좁은 강을 가로질러 에치빔을 놓고 땅과 빔에 걸쳐 지어놓은 집은 애교스러운 파격을 보여줘서 괜히 즐겁다.

 

 

 

버몬트주의 중심을 남북으로 가르며 솟아 있는 그린 마운틴의 계곡 곳곳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개천과 강을 만들고 있어서 다리도 많다. 그 다리 중에서 작은 다리에는 제각각 특색있는 지붕을 만들어 씌워서 독특한 인상과 미감을 준다. 지붕이 있는 다리를 커버드 브릿지(Covered Bridge)라고 한다. 저마다 독특한 디자인과 색칠이 되어 있어 인상적인데, 심지어 커버드 브릿지를 찾아다니는 관광코스가 다 있단다. 우드스톡 시내의 오토퀘치강에 걸쳐 있는 허름한 커버드 브릿지도 카메라 셔터를 유혹한다. 게다가 다리 옆에 서있는 나무를 요란스럽게 쪼아대는 오색 딱따구리가 나를 환영하는 듯 태연하다. 마을 한가운데는 연륜을 자랑하는 인상적인 교회와 그 옆 하얀 도서관이 마을의 중심을 잡고 있다. 비가 내린 이른 아침이라 행인은 거의 없지만 집집마다 현관과 낮은 담장에 울긋불긋 화사한 꽃들이 화분에 걸려 있어서 걷는 이를 즐겁게 한다.

 

 

 

 

 

마쉬 빌링스 록펠러 국립 역사유적 공원

 

우드스톡의 대표적 관광상품이 마쉬 빌링스 록펠러 국립 역사유적 공원 (Marsh-Billings- Rockefeller National Historical Park)이다. 잔뜩 기대를 하며 부지런히 찾아갔더니 메모리얼 데이 즉 현충일(5월 마지막 월요일)부터 문을 연단다. 뉴잉글랜드의 많은 관광지가 6월부터 10월까지 문을 연다. 그만큼 겨울이 길고 추운 지방인 것 같다. 굉장히 중요한 곳을 볼 수 없게 되어 너무 안타까웠다. 대신에 앞집의 빌링스 팜 박물관을 들어 갔다가 비싼 입장료만 내고 소똥 냄새만 맡고 돌아 나왔다. 이곳은 전통적 영국식 목장으로 말, 양, 젖소등이 너른 들판에서 사육되고 있었는데, 현재는 전문적 사육 농장이라기 보다는 관광 교육용 목장으로 운영되는 것 같으며, 과거 목장의 모습과 낙농기구들, 농부들의 생활상과 주거형태가 밀납 인형과 사진등으로 전시되고 있었고, 주로 유치원 아이들이 단체로 설명을 듣고 동물을 만져보기고 하고 마차를 타보기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구제역으로 시끄러운데 괜히 가축 우리를 찾아와서 한국에 입국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꺼림칙하기까지 했다.

 

 

마쉬 빌링스 록펠러 국립공원은 자연보호의 역사적 스토리와 토지 소유자의 책무를 일깨워주는 대표적 공원이다. 약 70만평의 숲이 잘 관리되어 자연자원의 보존, 교육, 휴양, 관광등에 잘 활용되고 있다. 이 공원의 이름이 긴 것은 이 숲을 보존하고 발전시킨 세 사람의 이름을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사람이 마쉬(George Perkins Marsh, 1801-1882)다. 마쉬는 자기집 농장인 이 숲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자연에 대한 통찰력을 키웠으며, 외교관이 되어 유럽을 돌면서 인간의 개발행위가 얼마나 자연을 황폐화시키는지를 수없이 목도하고 1864년 환경운동의 고전적 저서 ‘인간과 자연 (Man and Nature)’을 저술하였다.

 

그 두 번째 사람은 빌링스(Frederic Billings, 1823-1890)다. 원래 버몬트 태생인 빌링스는 변호사가 되어 캘리포니아 골드러쉬 시절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큰 돈을 벌어서 마쉬 가족의 농장을 인수했다. 남북전쟁 직후 유럽에서 이민자들이 버몬트로 물밀듯이 들어와 정착하면서 1800년대 중반 무렵 버몬트의 숲은 수없이 남획되어 침식되고 황폐화되었다. 빌링스는 후세에 현명한 숲 관리자의 모델을 남기기 위하여 농장을 조성하고, 과학적 숲 관리 프로그램을 미국 최초로 개발했다. 그가 죽은 후 빌링스의 플랜은 그의 부인과 세 딸이 이어받았고, 그 후에는 손녀딸 매리 프렌치(Mary French)에게 이어졌다.

 

마지막 세 번째 이름은 록펠러(Laurance S. Rockefeller)다. 록펠러는 빌링스의 손녀딸 매리 프렌치와 결혼해서 이 숲과 인연을 맺었다. 원래 록펠러 가문은 20개 이상의 국립공원을 조성하는데 기여해 온 자연애호 가문이었다. 로렌스 록펠러도 그 가문의 자연사랑 정신을 타고났다. 그는 다섯 명의 미국 대통령의 자문역으로 활동하면서 자연보존과 야외 레크레이션을 필수 국가 어젠다로 삼도록 노력했다. 결국 매리와 로렌스는 그들의 우드스톡 농장을 국가에 기증하여 버몬트주 최초의 국립공원인 마쉬 빌링스 록펠러 국립공원을 설립했다.

 

공원이 문을 열지는 않았지만 공원 입구에 있는 저택과 정원을 외부에서 둘러볼 수는 있었다. 1800년대 앤 여왕 시대풍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3층 저택은 흰색 창호를 단 붉은 벽돌집인데 마쉬의 아버지가 1805-07년에 지은 것이며, 무엇보다 집 앞에 서있는 독일가문비나무가 우람한 가지를 땅에 까지 드리우고 있는 늠늠한 모습이 나를 압도했다. 옛 장원들의 품격은 앤틱 스타일의 건축양식과 아울러 역사를 안고 자라온 아름드리 수목과 묵은 세월의 흔적이 합쳐서 이루어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저택 안에 있는 옛 가구들과 인테리어, 각종 풍경화 콜렉션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을 간직하고 저택 앞길을 가로질러 벨베데레 테라스 정원으로 갔다. 그리 화려하지 않은 이태리식 정원과 방갈로우를 쫒기듯 둘러보았다. 아직 개장 전이라 정원이 가꾸어지지는 않았지만 봄 기운에 수목과 화초들은 생기가 가득했다. 초봄인데도 불구하고 깊은 산중의 숲으로 들어가는 듯 녹음이 우거진 침엽수들이 늘어선 숲의 입구에서 발길을 돌렸다. 그 너머로 톰산(Mount Tom)으로 가는 약 30여km의 마차길이 있는데, 포그 호수와 톰산 능성이 곳곳의 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잘 관리되어진 숲의 진경을 보지 못하고 돌아섰다. 세상 모든 일과 자연까지도 사람을 잘 만나면 명품이 되고, 잘못 만나면 공해가 된다.

 

 

 

우드스톡은 이름 그대로 옛날에는 벌목 마을이었던 것이다. 모두들 돈을 벌기 위해 원시 숲의 커다란 나무들을 벌채하여 목재로 팔아 넘기고 주위의 산들이 남벌로 황폐화되어갈 때, 이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숲과 자연을 보존하려는 양식있는 부자들이 대를 이어가며 노력해서 명품 숲과 정원을 가꾸었으며, 마침내 국가에 헌납해서 국립공원을 만드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산골 깡촌 우드스톡을 명품 도시로 거듭나게 한 것이다.

게다가 빌링스 부부는 자연을 보존하고 가꾸는 열정에 더하여 미국의 자연 풍경을 가장 미국적으로 표현한 허드슨강파 풍경화를 비롯한 많은 그림들을 수집하여 아름다운 고옥에 가득 수장함으로써 후세에 길이 빛나는 문화유산을 남겨주었다. 이 저택의 미술품 감상만 하여도 이 먼 동네를 방문할 가치가 있다는 사람들의 얘기가 있을 정도이나, 우리는 입장하지 못하고 겉돌다가 떠날 수 밖에 없었다.